[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체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제2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까지 지냈던 독립운동가 박은식(朴殷植, 1859. 9. 30~1925. 11. 1) 선생이 한 말로 오늘은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날입니다. 선생이 이 말을 한 뜻은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한 직후 ‘황성신문’과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신문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하고 선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도 ‘금서(禁書)’로 처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이러한 무단탄압으로
배달겨레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배달겨레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하였던 것이지요. 마침내 선생은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안중근전(安重根傳)》 등을
쓰고 결국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서술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하게 됩니다.
《한국통사(韓國痛史)》를
펴낸 직후 중국, 러시아, 미주의 한국인 동포들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주고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드높였습니다. 일제는 이에 매우 당황해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를 만들고 《조선사(朝鮮史)》를 펴내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 역사의 왜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식민사관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박은식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오늘,
우리는 선생을 다시금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