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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새롭게 발견한 임금 얼굴 – 세조어진 초본

수장고 속 왕실유물 이야기, 12월(국립고궁박물관)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은 얼마 전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과 관련한 유물을 새로 입수하였습니다. 조선 제7대 임금 세조(1417-1468, 1455-1468 재위)의 어진 초본(草本)을 경매를 통해 구입한 것입니다. 초본이란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리는 밑그림이자 정본(正本) 제작을 위한 기초 작업물입니다. 혹은 뒤에 비슷한 그림을 또 그리기 위한 범본(範本)이 되기도 하지요.

 

세조어진 초본은 반투명한 얇은 종이에 먹선으로만 그려져 있는데, 비록 완성본은 아니지만 세조의 어진이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많은 정보를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초본은 누가 언제 그렸고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 박물관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김은호, 세조어진 초본

 

이 초본의 오른쪽 하단에는 金殷鎬印(김은호인)’이라고 새겨진 사각형 도장이 찍혀 있어 근대기의 인물화가 이당 김은호(1872-1979)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은호는 1912년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여 조석진, 안중식 등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사진을 참조하여 안면의 음영을 섬세하게 살린 사실적인 초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특히 뛰어났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알아본 고종의 의뢰로 육군대장복 차림의 순종어진 초본(1913), 홍룡포 차림의 순종어진(1916)을 그렸고, 이후 곤룡포 차림의 고종어진도 제작했다고 합니다. 1928년에는 황룡포를 입은 순종어진을 제작했고, 1935년에는 세조어진과 원종어진의 모사도 맡게 됩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활동이었지만 김은호를 마지막 어진화사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작업들 때문이지요.

 

초본은 어진을 모사할 때 어떤 역할을 할까요? 조선시대에 어진을 그리거나 모사하는 것은 대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관장하게 하는 국가행사였습니다. 도감 설치와 화원 선발에 이은 실제 어진 제작의 첫 번째 단계가 초본을 그리는 것입니다. 초본은 한지에 기름을 먹여 반투명하게 만든 기름종이에 먹선으로 그립니다. 살아있는 왕은 화가가 직접 대면하여 그렸지만 기존 어진을 모사할 때는 원본 어진을 평상 위에 놓고 그 위에 유지를 덮은 후 비치는 선을 떠냅니다.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초상화 초본들을 보면 유지 초본에도 뒷면에 배채를 하고 앞면에 음영과 채색을 더하여 얼굴빛 등 채색의 효과를 먼저 시험해 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어진 초본에 대해 임금과 왕세자 그리고 신하들의 품평과 수정을 여러 차례 거쳐 최종 사용될 초본이 정해집니다. 그 다음엔 완성된 초본 위에 실제 어진이 그려질 비단을 덮고 초본의 선을 비단 위에 옮겨 그립니다. 이것으로 초본의 역할은 끝납니다. 비단에 그려진 어진은 채색과 장황(일본에서 들어온 표구의 원말) 과정을 거쳐 완성되고 진전(어진을 모시는 곳)에 봉안되겠지요.


 

김은호의 세조어진 초본은 몇 가지 점에서 전통적인 어진 초본과 다릅니다. 첫째로 김은호는 초본 제작에 기름종이를 쓰지 않았습니다. 세조어진 초본은 가로 70cm, 세로 50cm 정도 크기의 비치는 얇은 황색 종이 6장을 이어 붙여 그린 것입니다. 김은호는 1913년 순종어진 초본을 유지에 그린 경험이 있는데, 이렇게 유지보다 얇고 강도가 약한 종이를 쓴 까닭이 무엇일까요?

 

재료가 달라진 까닭인지 조선시대 초상화 유지 초본과 달리 배채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은호는 옷 무늬를 빠짐없이 그렸지만 바닥에 깔린 채전(카펫처럼 바닥에 깔아두는 것)과 세조가 앉은 교의(신주나 영정을 놓아두는 의자)와 발받침 위의 무늬는 일부만 그리고 반복되는 무늬를 다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면 어쩌면 이 초본이 모사도 제작에 사용된 최종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조선시대라면 어진의 초본은 화가가 남겨 간직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진이 완성된 후 초본은 정본과 함께 봉안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불태우거나 먹을 물에 씻어버린 후 깨끗한 곳에 묻었습니다. 임금 그 자체나 마찬가지인 어진의 초본이 남아 서로 뒤섞이거나 소홀히 간수될까 염려한 까닭입니다.

 

김은호는 조선시대 어진화사들처럼 여러 대신들의 까다로운 감독을 받지 않고 모사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명 인물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김은호로서는 화가에게 재산이자 밑천이 되는 초본을 따로 보관해 두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1936년 김은호의 모사 작업이 끝나 창덕궁 선원전에는 모두 48본의 어진이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이 어진들을 비롯한 왕실유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부산으로 옮겨져 동광동 소재 부산국악원 내 벽돌식 창고에 임시 보관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무사히 넘긴 195412월 창고 인근 피난민 판자촌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부분이 불탔습니다. 이때 타고 남은 어진 몇 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지요. 세조어진은 김은호가 완성한 모사본과 그 원본이 모두 불타 그 모습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화가가 보관하고 있던 초본이 다시 세상에 나와 그 모습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홍주(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