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가면 정월 대보름날 낮에 쇠머리란 도구를 가지고 “쇠머리대기”를 합니다. 동부 마을과 서부 마을로 나누어서 서까래를 엮고 새끼로 묶어 쇠머리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고 이를 마을의 힘센 젊은이들이 메고 공터에서 서로 부딪히는데 부서지거나 땅에 먼저 내려앉는 쪽이 싸움에 지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펴낸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는 “목마경쟁(木馬競爭, 목마싸움)“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960년대에는 목우희(木牛戱) 또는 목우전(木牛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나무쇠싸움・소나무싸움 따위로도 불렸는데 1969년 이 놀이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 쇠머리대기란 이름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정월대보름 놀이로 행하여 오던 것을 1961년부터 3・1절에 행하게 되었지요. 이 고장이 기미 3・1 독립만세운동 때 조상들이 피 흘려 싸웠던 것을 기리기 위해 ‘3・1 민속문화제’를 열고, 이때에 호국 영령에게 제사지내기, 영산의 고유 민속놀이인 쇠머리대기, 줄당기기, 서낭대싸움놀이, 진잡이놀이, 문호장굿놀이 따위를 모두 함께 합니다. 쇠머리대기를 할 때에는 영산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가까운 다른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놀이도 하고, 음식과 막걸리를 마시며 잔치를 즐깁니다.
쇠머리대기는 나무쇠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양편에서는 풀물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중장・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승리할 수가 있지요. 이 쇠머리대기는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만들었던 당시의 쇠머리 크기는 폭 4미터, 길이 5미터, 높이 3.5미터였고, 무게는 1.5톤이나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