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선생은 일제강점기 드물게 언론, 역사, 그리고 독립운동 세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분입니다. 먼저 언론인으로서는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에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침략 논리를 적극 비판하는 애국계몽운동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사학자로서는 일제가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식민사관에 맞서서 역사의식을 갖추는 것이 곧 애국심을 키우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인 《독사신론(讀史新論)》과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체계를 수립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같은 역사서들을 쓰고, 일제의 거짓 학설에 맞서 학문적인 투쟁을 펼쳤습니다. 특히 단재는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라고 강조할 정도였습니다.
이어서 독립운동가로도 뛰어난 활동을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형성과 국권피탈 이후 최대의 한민족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의 조직에 힘쓰고 1928년 4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으며,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려는 노력도 합니다. 그 뒤 1929년 5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지요. 수감중이던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에서 '보호자가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했으나, 출감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까닭으로 선생은 가석방을 거절했습니다. 1936년 2월 18일, 선생은 감옥에서 뇌일혈로 쓰러졌고 사흘 뒤 감방 안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오늘은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고 외쳤던 단재 선생을 기려야 할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