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함경도 원산을 지나다 명태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한강에 땔나무를 쌓아놓은 것처럼 많아서 그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는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시 조선 말기의 문신 김기수(金綺秀:1832∼?)의 견문기록 《일동기유(日東記游)》에는 “물속에서 활발하게 살아 헤엄치는 명태가 구경거리가 아닐 정도로 너무 많이 잡히고 값이 싼 까닭에 두메산골에 사는 노인들과 여자는 물론 아이들까지 명태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라는 기록이이 나올 정도로 명태는 흔했습니다.
겨울이면 원산 앞바다에서 명태가 많이 잡히는 바람에 원산에서는 다들 명태 말리는 일에 매달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것을 주고서 지나치게 생색낸다는 뜻의 “북어 한 마리 부조한 놈이 제사상 엎는다.”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또 별 볼일 없는 명태장사를 하는 척 하면서 다른 장사를 한다는 뜻의 “명태 한 마리 놓고 딴전을 본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싱싱한 생물 상태면 ‘생태’, 얼린 것은 ‘동태’, 말린 것은 북어 또는 건태, 한 겨울에 덕장에 걸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얼고 녹기를 스무 번 이상 반복해 노랗게 변한 것은 ‘황태’, 내장과 아가미를 빼고 4~5마리를 한 코에 꿰어 꾸덕꾸덕 말린 것은 ‘코다리’, 얼어붙어서 더덕처럼 마른 북어를 ‘더덕북어’라는 말로도 부릅니다. 그밖에 어린 명태를 애기태, 애태, 노가리라고도 하지요. 그 흔하던 명태가 지금은 러시아산밖에 먹을 수가 없는데 《임하필기》에 “지금은 명태가 땔나무처럼 많지만 300년 뒤에는 귀해질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