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침저녁은 좀 선선해도 한낮엔 제법 여름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데는 왕골 돗자리도 한 몫 하지요. 우리는 이 돗자리를 만드는 재료인 왕골로 자리, 돗자리, 방석, 송동이, 합 따위를 만들어 씁니다. 왕골은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 2년생 풀로서 키는 60∼200㎝에 이르며 완초, 용수초, 현완, 석룡초라고도 부르지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왕골이 신라시대에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때에는 사직신(社稷神)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 주로 썼고 중국에 보내는 선물로도 사용되었지요. 조선시대에는 매우 귀한 제품으로 궁중이나 상류계층에서 썼음은 물론, 외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으로도 썼습니다. 완초제품은 그 수요가 엄청났음에도 조선시대 조정 소속의 경공장(京工匠)이나 지방정부의 외공장(外工匠)에는 완초장은 두지 않았으며, 대신 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에 석장(席匠)을 두어 완초석(왕골돗자리)을 비롯한 돗자리의 조달을 담당하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요가 많았던 왕골제품은 한때 단절위기도 있었지만 1970년 이후 그 제작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장인을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莞草匠)”으로 지정했지요. 현 완초장 기능보유자는 강화의 이상재 선생으로, 그의 기능은 왕골을 손으로 엮어 만드는 화방석ㆍ꽃삼합(음식을 담아두거나 바느질 광주리로 쓰던 그릇)ㆍ소품 따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