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① 사물이 보거나 듣기에 좋은 느낌을 가지게 할 만하다. ② 마음에 들게 갸륵하고 훌륭하다.
2) ① 사물, 현상의 상태나 모양이 조화를 이루어 마음에 만족한 느낌을 자아낼 만큼 이쁘고 곱다. ② 들리는 소리가 감정ㆍ정서에 맞게 조화를 이루어 마음에 만족한 느낌을 자아낼 만하다. ③ (사람들 사이의 관계 곧 언행, 소행, 덕행, 도덕, 동지애, 협조 정신 등이) 사람들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바르고 훌륭하다.
3) ①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②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보다시피 1)《우리말큰사전》과 3)《표준국어대사전》은 두 몫으로 나누어 풀이하고, 2)《조선말대사전》은 세 몫으로 나누어 풀이해서 크게 다른 듯하다. 그러나 1)《우리말큰사전》과 3)《표준국어대사전》이 ‘보는 것(눈)’과 ‘듣는 것(귀)’을 하나로 묶어 풀이하고, 2)《조선말대사전》에서는 그것을 따로 몫을 나누어 풀이했을 뿐이기에 속내로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까 결국 국어사전들은 ‘아름답다’라는 낱말을 잘게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 뜻풀이를 했다.
첫째, 눈에 보이는 것이 좋은 느낌을 자아내면 아름답다는 것이다. 둘째, 귀에 들리는 것이 좋은 느낌을 자아내면 아름답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사람 사이의 관계? 일이나 마음씨?)이 갸륵하고(바르고) 훌륭하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추리면, ‘아름답다’라는 낱말은 보이거나 들리는 것(겉모습)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속살)으로 두 가지 속살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겉모습은 좋은 느낌을 자아내면 아름답고, 속살은 갸륵하고 훌륭하면 아름답다는 것으로 풀이한 셈이다.
이런 뜻풀이는 그럴듯하지만 뭔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겉모습이 ‘어떻게 되면’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인지, 속살이 ‘어떻게 되면’ 갸륵하고 훌륭한지를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겉모습이든 속살이든 ‘어떻게 되어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우리 겨레가 아름다움을 어떻게 알고 사는 것인지도 밝혀질 수가 있겠는데,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겉모습이든 속살이든 ‘어떻게 되어야’ 아름다울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을 풀어 보자면 이야기가 너무나 길어진다. 그뿐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물음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온갖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도 할 이야기는 끝없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우리 겨레가 쓰는 ‘아름답다’라는 낱말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겨레가 ‘아름답다’라는 낱말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알아보는 첫걸음은 그 낱말의 짜임새를 살펴보는 일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아름답다’는 ‘아름’과 ‘답다’가 나란히 이어졌다. ‘아름’을 몸통으로 삼고 ‘답다’를 꼬리로 삼아서 만들어진 낱말이다. 그러니 ‘아름답다’라는 낱말은 ‘아름’과 ‘답다’를 살펴보면 뜻이 쉽게 드러날 듯하다.
‘답다’는 널리 쓰이는 낱말꼬리로서 ‘사람답다’, ‘어른답다’, ‘아이답다’, ‘사장답다’, ‘직원답다’, ‘학생답다’, ‘교사답다’, 이렇게 사람을 뜻하는 낱말을 몸통으로 삼고 거기에 붙는다. 그리고 그 몸통이 마땅히 있어야 할 거기에 넘칠 만큼 잘 있다는 뜻을 드러낸다. 일테면, ‘사람답다’ 하는 말은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것을 남김없이 갖추고 가장 바람직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하는 뜻이다.
그러나 ‘답다’가 사람을 뜻하는 낱말만을 몸통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참답다, 꽃답다, 실답다, 가정답다, 학교답다, 회사답다’ 하다가 나아가서 마침내 ‘고양이답다, 개답다, 개나리답다, 진달래답다’ 해도 틀렸다 할 수는 없다. 그만큼 ‘답다’는 쓰임새가 열려 있는 낱말꼬리인데, 무엇을 몸통으로 삼든지 그것이 드러내는 뜻은, 그 몸통이 마땅히 있어야 할 거기에 넘칠 만큼 가장 바람직한 그것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낱말의 몸통이 마땅히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것, 한자말로 하면 ‘이상(理想)’ 또는 서양말로 하면 ‘이데아(idea)’를 뜻한다고 하겠다.
그러면 몸통인 ‘아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알암’이고, ‘알암’’은 곧 ‘알밤’이다. ‘알밤’은 본디 ‘알킧’이었다가 ‘알킧’을 거쳐 ‘알퇺(알암)’이 되고, 이제 ‘ㅂ’이 사라지니까 ‘ㄹ’이 아래로 흘러내려서 ‘아퀬(아람)’으로 바뀌고, ‘·’가 사라지면서 ‘ㅡ’로 바뀌니까 마침내 ‘아름’이 되었다. 그런 사정은 한글을 만들어 쓴 15세기 뒤로 적힌 자료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름답다’라는 낱말의 뿌리는 ‘알밤답다’이다. 그런데 ‘알밤답다’의 속살이 어떻게 ‘아름답다’의 속살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 물음의 대답 안에 우리 겨레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감추어져 있다.
‘알밤’은 무엇인가? 밤의 껍데기를 모두 벗기면 맨 마지막에 드러나는 알맹이가 알밤이다. 알밤은 어떠한가? 살결이 보얗고 깨끗한 빛깔을 내면서 속까지 단단하다. 입에 넣고 깨물면 오도독 소리를 내고 깨어지면서 달큼하고 고소한 맛을 낸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남의 집 아기를 처음 만나서 가장 좋은 말로 기려 주려면 반드시 “아따, 그놈 참 알밤같이 생겼네!” 하거나 “아따, 그 녀석 꼭 깎아 놓은 알밤 같네!” 했다. 아기의 생김새가 알차며 깨끗하고 단단하다는 뜻인데, 그것을 언제나 굳이 알밤에다 빗대었던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깎아서 드러난 알밤만으로 알밤의 아름다움을 헤아린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 겨레가 알밤을 아름다움의 뿌리로 바라본 것은 밤이라는 열매를 모두 생각했기 때문이다. 밤이라는 열매는 우선 겉으로 험상궂은 ‘밤송이’에 싸여 있다. 손이 닿으면 찔리는 가시투성이인 밤송이 안에 알밤은 깊이 감추어져 있다. 이 거칠고 험상궂은 밤송이를 애써 까고 나면 거기에는 반들거리는 ‘밤톨’이 드러난다.
밤톨도 매끄럽고 딱딱한 껍질로 알밤을 단단히 감추어 싸고 있다. 이 딱딱하고 매끄러운 밤톨 껍질을 벗기면 이제는 또 트실트실한 ‘보늬’가 드러난다. 보늬는 부드럽지만 텁텁한 맛을 내어서 그냥 먹으려고 달려들기 어렵고, 벗기려 해도 단단히 달라붙어서 쉽지 않다. 그만큼 알뜰하게 감싸고 있는 보늬를 공들여 벗기면 그제야 마지막으로 알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마다 깊은 뜻을 지닌 세 겹의 껍질로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이것이 밤이라는 열매의 모습이다.
겉모습으로 보고는 험상궂어서 쉽게 다가갈 마음도 먹기 어려운 밤송이를 한사코 벗겨 내고, 한결 나아졌지만 그래도 매끄럽고 딱딱한 밤톨의 껍질도 애써 까내고, 한결 더 부드러워졌지만 텁텁하여 입에 대기 어려운 보늬까지 벗겨 내고야 만날 수 있는 알밤. 세 겹의 만만찮은 껍질을 벗기고 들어온 이에게는 하얗고 깨끗하고 단단한 속살과 고소하고 달콤한 맛을 남김없이 보여 주는 알밤.
그런 알밤은 온통 보얀 살결로만 이루어져서 어디를 뒤져 보아도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하다. 겉으로 드러내어 떠벌리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좀처럼 닿아 볼 수 없도록 겹겹이 깊숙하게 감추어진 알밤. 이런 알밤을 우리 겨레는 아름다움의 참모습으로 알고, 이런 알밤다우면 그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알밤은 서낭에게 바치는 제물의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알다시피 서낭에게 제물로 바치는 열매는 모두 꼭지 쪽으로만 자르고 껍질을 벗기지 않는 법이지만, 오직 맨 윗자리에 놓는 밤만은 세 겹의 껍질을 모두 벗겨 내고 알밤으로 바쳐야 한다. 알밤을 아름다움의 알맹이로 여기는 우리 겨레의 마음이 서낭에게 바치는 제물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말이다.
‘아름답다’라는 우리 토박이말의 속살이 놀랍고, 이런 낱말을 만들어 낸 우리 겨레의 슬기와 설미(몸과 더불어 마음의 가장자리인 느낌을 비롯하여 생각과 뜻을 아우른 자리에서 솟아나는 힘)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런데도 안다는 사람들과 배웠다는 사람들은 아직도 ‘아름다움’이라는 토박이말을 가꾸어 쓸 궁리는 하지 않고, 굳이 ‘미(美)’라는 한자말을 부려 쓰려고 한다. ‘미적, 미술, 미학, 미감, 미관’같이 다른 글자를 보태서 만든 낱말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냥 외자인 ‘미’를 낱말로 삼아서 ‘미에 대하여, 미를 위하여, 미는 고사하고, 미와 함께’ 이렇게 쓰기를 밥 먹듯이 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중국의 옛사람들이 뜻을 담아 만든 글자인 ‘미’를 우리 선조들이 만든 ‘아름다움’과 견주면, 저들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 마음을 지니고 다른 삶을 살았는지를 알 만하다. 저들의 ‘미’는 ‘염소 양(羊)’자 아래 ‘큰 대(大)’자를 붙여서 만들었다. ‘염소가 크다’는 것이 미, 곧 아름답다는 말이다. 염소가 크면 어째서 아름다울까? 그건 염소를 알면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염소는 여러 가지인데, 여기서 말하는 중국 사람들의 염소는 이른바 ‘면양’이라는 털염소를 뜻한다. 이 털염소는 우선 해마다 털을 깎아서 온갖 입성의 감으로 값지게 쓰인다. 그리고 털염소를 잡으면 고기 맛이 좋아서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가장 값진 고기로 여겼다. 오죽했으면 “만두 속에는 값싼 개고기를 넣으면서 만두집 대문 위에는 염소 대가리를 내다 건다.(양두구육)”라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염소는 중국 사람들에게 먹고 입는 일에서 가장 보배로운 짐승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가장 좋은 입성의 감, 가장 좋은 먹거리의 감이 크면 클수록 중국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저들도 서낭에게 제물을 바칠 적에는 염소를 가장 좋은 제물로 여겼다.
우리 겨레가 알밤을 아름다움의 알맹이로 여기는 것과는 달리, 중국 사람들은 큰 염소를 아름다움의 뿌리로 여기는 것이다. 어느 쪽이 아름다움을 더욱 잘 깨달았는지 따지는 것은 이렇다 할 쓸모가 없겠지만, 서로가 너무 다른 눈으로 아름다움을 찾았다는 사실은 뚜렷이 알 수 있다.
서로의 다름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야말로 인류 문명을 푸지고 넉넉하게 살리는 길이니, 우리도 중국이나 일본이나 서양을 따르려 애쓰기에 앞서 먼저 우리만의 것을 지키고 가꾸는 일부터 힘써야 한다. 우리만의 것을 지키고 가꾸는 길에서 첫손 꼽히는 것이 바로 우리 토박이말을 살리고 가꾸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