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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려져 나간 한쪽 발 대마도를 되찾아야

‘다케시마[竹島]의 날’에 대한 ‘대마도의 날’
[술봉의 희망엽서 3]

[우리문화신문=진용옥 명예교수]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對馬島本是我國之地]” 이는 서지학자 이종악 선생이 독도 박물관 앞에 세운 빗돌에 있는 내용이다. 일본 시마네 현은 2006년부터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하는데 이에 당시 마산시 의회는 대응차원에서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출발한 날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정부 관여행사로 지속하지만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관여하지 않으며 대마도 고유 영토설은 소수 의견에 그치고 있다.

 

 

 

대마도의 양속성[兩屬性]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평화 시에는 한돌곶[한반도]과 왜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대마도는 처음 아비루 가문이 지배하였으나, 12세기 송(宗) 씨가 아비루가를 평정 하면서 이후 송 씨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고려와 조선으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며, 왜국에서 대명으로 임명 받는 등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양쪽에 다 속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생존과 존립을 위해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한돌곶[突串]에 의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본에 결탁하였기 때문이다.

 

동방 해륙문화에서 대마도

 

빙하기 때 황해는 초원이었는데 북방 동토지대[툰드라]에서 흘러나온 빙하수에 의하여 초원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은 사막으로 덮여 있어 황해와 양자강은 흐를 수가 없었다. 한돌곶[반도]은 바다가 없는 대륙이었고 동해는 호수였으며 대마도와 열도는 한돌곶에 이어져 있었다.

 

12,000년 무렵부터 황해가 물에 차오르면서 제주도, 대마도 백령도 등이 섬으로 분리되었으며 대한해협이 동해와 남해로 연결되면서 동방대륙은 동방돌곶[반도]으로 변했고 한민족은 해양과 대륙 양면에서 양립된 역사문화를 펼쳐나갔다.[@윤명철1986] 동방 해륙문화의 대표적 유적은 반구대 암각, 창녕 비봉리 목선과 신석기 시기의 조개무지다.

 

 

 

대마도 조개무지(패총)에서 출토된 투박조개팔찌[아래 그림]는 대륙에서 생산된 유물이다. 대마도 월고 유적[越高-고사다카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제주도 오산리, 연해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토기와 유사하다. 돋음줄무늬(융기문) 토기는 인류 사상 최초이며 신석기 혁명의 산물이었다.

 

동방 해륙문화의 이단- 여진과 신라해적 그리고 왜구

 

신라 해적은 장보고의 해상활동에서 존재가 예상되고 있지만 우리 역사에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왜국과 대마도를 습격한 신라 구[新羅寇] 사건은 여러 곳에 그 기록이 보인다. 583년(진평왕 5)에 선부서(船府署)가 설치되면서 해상활동을 강화하고 기관을 운운영한 것은 이런 일본 본토 해적과 왜구의 방비책이었다. 7세기 무렵 장보고가 살해된 이후 그 부하들이 동방 지중해 일대를 제폐하는 막강한 해적 세력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며 백제 유민들이 합세한 가능성도 있다. 고려 삼별초의 잔존세력도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역사의 주류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점이다.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토지도 적어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갖춰야만 했다. 하지만 열도 내부에서는 격렬한 전란이 거듭되고 패전한 장수와 병력들이 대마도로 모이게 되자 교역만으로는 충분한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인근 지역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왜구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고려와 조선, 원(元)과 명(明)의 해안 지역을 침입하고 약탈하면서 많은 피해를 주었다.

 

1274년과 1281년에는 려몽 연합국이 왜국을 정벌하면서 진봉선 무역은 끝났지만 교역 창구를 잃은 대마도는 살길을 찾아 왜구로 변해 노략질을 일삼는 소굴이 되었다. 1389년 고려는 박위가 대마도를 토벌했으며 고려와 조선은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해안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으며. 1389년(창왕 1)부터 1419년(세종 1)까지 3차례에 걸쳐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고려와 조선의 정벌을 통해 대마도의 왜구는 세력이 크게 꺾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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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해적(島夷)의 대마도 침입

 

1005년부터 확인되는 동여진 해적의 고려 동해안 침입은 현종 연간 (1009~1031)에 가장 극심했다.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포로모타부의 범위에 포함되는 여진 집단들에 의한 것이었다. 포로모타부는 한반도 동북 해안지대와 두만강 중ㆍ하류 유역,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남부 뽀시옛만 연안 지역 등에 거주했던 여진족들을 지칭한 『요사』에서의 이름이다.

 

동여진 해적의 침입은 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포로모타부의 여진 부족들은 통일적인 정치체를 구성하지 못했던 까닭에, 침략의 규모나 주체에 있어서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었다. 포로모타부의 세력이 가장 확대되었던 11세기 전반기에 동여진 해적의 활동이 가장 극심했으며, 1030년대 이후 여진 부족들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자, 해적 활동은 소규모화 되어 위축되었다.

 

1050년 전후 한때 포로모타부와 거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동여진 해적의 침입이 증가한 적도 있었으나, 11세기 후반에는 전반적으로 동여진 지역에 대한 고려의 통제력이 강고하게 유지되었고, 동여진 해적의 침략 역시 현저하게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도이(島夷)란 섬 오랑캐로서 양자강 유역의 바다 오랑캐[海夷]들이 동방대륙[만주]으로 진출하고 다시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동해안에 진출하고 우산국을 침략했다고 본다. 이들은 또 1019년에는 대마도에도 침입했으며, 일본의 이키(壱岐), 쓰시마(対馬)와 지쿠젠(筑前) 등을 침략한다. 도이내구(刀伊来寇)라고도 한다.

 

태종의 대마도 정벌[己亥東征]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가 9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도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 바람에 거슬려 다시 거제도에 와서 배를 매니, 병선 수효가 모두 2백 27척이고, 서울로부터 출정 나간 사람이 6백 69명이고, 갑사ㆍ별패ㆍ시위ㆍ영진속(營鎭屬)과 자기가 모집한 건강한 잡색군(雜色軍)과 원기선군(元騎船軍-배에서 말탄 군인)을 합해, 1만 7천 2백 85명과 65일 양식을 싸 가지고 행진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6월 17일]

 

 

왜국통신사 행렬도에서 기선장[오늘날 해병 역할]

 

이틀 후 6월 19일 사시(巳時)에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 다시 대마도로 향하였다. 이듬해 1420년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가 될 것을 요청해 대마도를 경상도에 동래부에 예속시키고 대마도주에게 구리로 만든 도장을 내렸다. 후임 도주가 세습할 때에도 우리 구리 도장을 받아 갔다. (《세종실록》 11년-1429년 4월 20일)

 

대마도주는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일본사람에게 문인(文引, 도항허가서)을 발행하여 조선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은 부산포, 염포, 제포에서만 대마도와 거래할 수 있게 했고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영원토록 귀국(조선)의 신하로서 충절을 다할 것이다.” (《성종실록》, 18년 2월 7일)

 

세사미(歲賜米)와 세견선(歲遣船)

 

“‘최공(崔公)이 금년 정월에 보낸 서계(書契)를 받자오니,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라고 했는데,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해마다 대마도 도주(島主)에게 내려주는 쌀을 세사미(歲賜米)라 한다. 세종 때 2백 석으로 정하고 세견선(歲遣船)은 50척으로 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살길이 어려워지자 중종 때 삼포 왜란(三浦倭亂)을 일으켰는데, 세사미를 1백석으로 줄이고 세계선 또한 25척으로 제한했다. 살길이 막막한 대마도주는 결국 임진왜란을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대마탐라 양지론[對馬耽羅 兩趾論]

 

‘해동지도’에서는 “한돌곶 전체를 보면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 영남의 대마(대마도)와 호남의 탐라(제주도)를 양발로 삼는다.( 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라고 하였다.

 

대마는 우리 민족의 한쪽 다리다. 대마가 없다면 다리가 잘린 지제 부자유 형국이다. 그밖에 대마도가 한국령이라는 지도는 수많이 그려져 있다. 일본은 1861~1862년 오가사와라 영유권 분쟁 당시,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프랑스어판)를 제시해 오가사와라가 일본영토임을 인정받았다. 그때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지도에 대마도는 한국 땅으로 되어 있다[@김상훈2011]

 

 

해동지지 경상도 부분 그리고 일본 소장<조선팔도지도>.하야시 시헤이의 서명이 오른쪽에 있다.

 

맺음말

 

대마는 본시 우리의 땅이지만 적극적 경략이 부족하여 넘겨준 꼴이었다. 지리상 역사상 양속성을 가지는 숙명이지만 우리는 우산국과 대마국 그리고 탐라국과 백령도로 이어 지는 동방 해륙 문화의 전초선을 살리지 못했다. 잘라져나간 그 한쪽 발을 되찾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기 이전에 먼저 이런 속성을 알아야 하고 해양 진출의 관점에서 대마도의 활동을 살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