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grumbling’이 항의, 불평, 투덜거림이라는 뜻이니, 전시 제목 <uncomfortable grumbling>은 불편한 항의 혹은 불편한 투덜거림의 뜻이겠다.
사진가 정지현의 ‘uncomfortable grumbling’이 시작된 것은, 월출산 자락에 사는 한 여성을 만나고 난 이후다. 그녀는 한 돌이 채 되기 전에 대나무 숲에 버려졌다. 간난장이가 밤새 울어서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할 것 같자, 어머니가 밤에 몰래 그녀를 대나무 숲에 버린 것이다. 다음날 새벽에 언니들이 아기를 찾아왔는데, 밤마다 버려지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정지현은 그녀의 이야기가 잊히질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늠될 것만 같다.’라고 한 황현산 선생의 말을 빌자면, 한국사를 전공하고 개발과 여성에 관한 작업을 지속해온 사진가 정지현의 ‘두터운 현재’가 짙은 감수성을 만들었을 것이다.
2016년 홍성의 ‘민간인학살유해발굴’ 현장에서,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아달라고 매일 찾아오던 유가족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지현에게는 전쟁의 광기 속에 제주에서, 노근리에서, 거창에서, 그리고 한반도 전역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70년 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현재’였다. 살아남아 전쟁의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 사연과 기억을 전해 듣고, 전국 각지의 민간인학살지역을 수년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 그 때문이다.
이제는 건물이 들어서거나 운동장으로 도로로 공원으로 변해 그 흔적과 기억이 덮여졌어도, 그곳이 당시 학살의 현장이었던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므로. <uncomfortable grumbling>은 정지현과 신명선의 공동작업이다. (‘grumbling’에는 많은 사람이 중구난방 식으로 하는 항의라는 뜻도 담겨 있다.) 신명선은 정지현이 찍은 사진들 위에 다시 한 겹 직접 드로잉한 이미지를 덧얹었다. 작가 스스로 ‘동시대의 즉각적 소비와 반응’이라고 표현한 제도들은 넷플릭스 로고, 코로나19 뉴스, NASA와 톰 크루즈의 우주공간에서의 영화 촬영에 관한 트윗, 심슨가족, 나이키 등 같은 시간대의 여러 논쟁점들이다.
두 작가의 협업이자 사진과 미술 장르 간 협업인 <uncomfortable grumbling>은, 현재적 공간의 이미지 위에 다시 이미지를 덮음으로써 역설적이게도 70년의 시공을 넘어서 잊히고 은폐된 기억에 더욱 근접케 한다.
전시는 정지현의 <Post - Memory> 두 번째 시리즈이며, 7월 7일부터 2주 동안 류가헌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