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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왕조실록> 세계 기록 유산이 되다

김찬곤 지음‧권아라 그림, 사계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은 ‘기록의 나라’다.  이렇게 세밀하게 기록하고, 또 기록한 나라가 있을까 싶을 만큼 조선은 통치 행위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왕의 언행을 기록으로 남긴 나라는 조선 외에도 많다. 중국과 베트남, 일본에도 실록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수록내용의 다양성과 방대함, 공정성 측면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이 책은 이런 실록의 이모저모를 청소년과 성인도 알기 쉽게, 풍부한 자료사진과 함께 풀어냈다. 사계절이 펴내는 ‘고전맛집’ 시리즈는 ‘어른이 되기 전 꼭 읽어야 할 고전을 쉽고 맛있게 엮는다’는 취지로 기획되었고, 조선왕조실록편은 그중 두 번째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기록되고 있었기에 조선의 왕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역사의 책임을 무겁게 의식해야 했다. 내가 한 일을 후대의 누구도 알 수 없다면,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살다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들이, 행동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수백 년 후에도 전례로 쓰이고, 영원히 역사 속에 박제된다면? 그때는 그 누구도 행동을 가벼이 할 수 없었다.

 

이런 기록문화는 조선왕조를 5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지탱한 ‘역사의 소금’이자, 지배권력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실록의 놀랍고 다양한 이모저모를, 사관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문: 사관으로 뽑히는 건 가문의 영광이라고 들었는데, 우선 임용을 축하한다. 사관의 인재상과 임용조건은 어떻게 되나?

 

답: 아직도 실감이 안 나고 얼떨떨하다. 사관은 왕의 말과 명령을 기록하는 관청인 예문관에 속한 관료이다. 사관은 겸임 사관과 전임 사관으로 나뉜다. 겸임 사관은 자신이 속한 관청 일을 하면서 사관 일까지 겸하고, 전임 사관은 사관 일만 전문으로 맡는다. 보통 ‘사관’이라고 하면 이 전임 사관을 말한다.

 

예문관 전임 사관은 모두 8명이 있는데, 이 여덟 명을 ‘붓으로 역사를 쓰는 무리’라는 뜻의 ‘팔한림(八翰林)’으로 부른다. 과거 문과 급제자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고, 대인관계도 살펴 유생 시절부터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 사관이 될 수 없다. 공식 인재상은 '재학식(才學識)을 두루 갖춘 자’라 할 수 있다. 재(才)는 역사를 기록할 능력, 학(學)은 해박한 역사 지식, 식(識)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조상 중에 부정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있어도 안 되고, 집안 전체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한마디로 양반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양반만 뽑는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반드시 결혼을 한 사람 중에서 뽑는데, 사관이 된 다음 혼인을 해서 처가 쪽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문: 본인도 뛰어나야 하지만 조상, 처가, 외가 삼박자도 갖춰야 하니 사관 임용이 가문의 영광일 만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힘든 사관은 선배가 후배를 뽑는 방식이라던데? 채용절차는 어떻게 되나?

 

답: 그렇다. 우리는 예문관 선배가 후배를 뽑는 방식이다. 사관을 하다가 한 사람이 다른 관직으로 옮겨가면 선배 사관이 후배 몇 명을 추천하고, 이 가운데서 시험을 치러 한 사람을 뽑는다. 아무래도 이렇게 추천으로 뽑다 보니 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제도가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정 수준 객관성이 담보되었다는 뜻으로 봐 달라.

 

문: 추천제로 뽑는 것이 신기하다. 근무환경은 어떤가?

 

답: 우리는 승정원 주서와 함께 임금이 나랏일을 볼 때 곁에서 기록을 한다. 사관 두 사람은 임금 좌우에 앉고,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에 속한 주서는 왼쪽에 앉는다. 이렇게 세 사람이 작은 상 위에 공책을 놓고 왕과 신하들이 하는 대화를 속필로 빠르게 쓴다. 대화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정자체로 또박또박 쓸 수가 없기 때문에 필기체인 초서체로 쓰는데, 우리가 왕 앞에서 기록한 이 자료를 ‘입시 사초(入侍 史草)’라 한다. 이 입시 사초는 날마다 춘추관에 제출한다.

 

문: 온종일 대화를 빠르게 기록하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집에 가서도 일을 했다고?

 

답: 그렇다. 정식 근무 시간에 쓰는게 입시 사초라면, 집에 가서는 ‘가장 사초(家藏 史草)’라는 것을 써야 했다. 이것은 궁궐에서 퇴근한 뒤 집에서 낮에 보고 들은 일을 되짚어가며 쓰는 기록이다. 입시 사초는 현장에서 그대로 빠르게 써야 하고 내 의견을 넣을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사초에는 내가 한 인물 평가나 생각, 즉 ‘사론(史論)’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가장 사초는 매일 춘추관에 내지 않고,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왕이 승하하고 실록청이 꾸려지면 그때 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사신왈...’로 시작하는 구절이 바로 가장 사초에서 온 기록이다.

 

문: 사론이 많이 들어가 있어 입시 사초보다 훨씬 민감한 자료였을 것 같다. 혹시 가장 사초를 제출하지 않을 수도 있나?

 

답: 가장 사초는 사관이 생각해도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은 부분이 많이 들어가 있고, 만약 실록 편찬 책임자를 나쁘게 적어놓은 구절이라도 들어있다면 후환이 두려워 정말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 안에 가장 사초를 내지 않으면 큰 벌을 받는다. 자손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벌금으로 은 20냥을 내야 한다. 사관이 죽어도 식구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실록청이 꾸려지면 내야 한다.

 

문: 역사에 자기 목소리를 넣을 수 있는 건 영광이지만, 정말 부담이 컸겠다. 그러면 실록을 편찬할 때 이 사초를 누가 썼는지 다 알 수 있는 건가?

 

답: 그게 바로 계속 논란이 된 사초 실명제다. 원래는 입시 사초든 가장 사초든 춘추관이나 실록청에 낼 때 맨 앞에 내 이름을 써야 한다. 그런데 사관은 사실 직급이 높지 않은 말단 공무원이다. 그런데 내 이름을 쓰고 왕이나 대신을 비판한다? 물론 사관은 목숨을 내놓고 써야한다고들 하지만, 그거 쉽지 않다. 그래서 대신들과 사관들 사이에 계속 줄다리기가 있었다. 대신들은 사관 이름 쓰라고 하고, 우리는 쓰지 말자고 하고. 사초 실명제는 그래서 어떤 때는 있었고, 어떤 때는 없었다. 예종 때 ‘민수’라는 사관이 자신의 이름을 쓴 가장 사초를 냈다가, 자신이 실록 편찬 책임자 양성지를 비판하는 대목을 쓴 게 후회가 되어 다시 빼내어 살짝 고쳤다가 발각이 된 적이 있다. 그 일로 민수는 곤장 100대를 맞고 제주도 관청 노비가 됐고, 사초를 빼내는 걸 도와줬던 강치성과 원숙강은 참형을 당했다. 그 뒤로 한동안 사초 실명제가 폐지됐었다.

 

문: 사초에 자신을 이름을 써야 하면 정말 사론을 쓰는 게 힘들었겠다. 그래도 역시 실록의 꽃은 사론 아닌가?

 

답: 맞다. 이런 사론은 동아시아 어떤 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사론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은 군주라 해도 볼 수 없었다. 전례를 살피기 위해 실록을 볼 필요가 있으면 사관을 보내 해당 부분만 베껴오게 하거나, 승정원일기를 찾아봤다. 그런데 사론의 횟수는 확실히 왕권의 강약과도 관련이 있다. 조선 초에는 정종실록에 1곳, 단종실록에 4곳, 세조실록에 5곳이었던 것이 성종실록에서는 629곳, 중종실록에서는 1305곳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신권이 왕권보다 세졌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전체에 등장하는 사론은 모두 5729곳이다.

 

문: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은 어떤가 ?

 

왕이 승하하면 일단 실록청이 꾸려진다. 실록을 편찬하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시정기’다. 이것은 전임 사관이 날마다 기록한 입시 사초와 겸임 사관이 작성한 춘추관일기, 중앙관청의 업무 일지까지 살펴으로서 연월일 순서로 정리하여 일정 기간을 묶은 것이다. 춘추관은 해마다 연말에 책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3년마다 책으로 인쇄해 보관해 놓았다. 이렇게 그때그때 시정기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선대왕의 재위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비교적 쉽게 실록을 편찬할 수 있었다. 시정기는 실제로 실록과 별로 내용에 차이가 없어 ‘준실록’으로 불리기도 한다. 초초, 중초, 정초 이렇게 총 3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최종 실록이 나오고, 다섯 질을 인쇄해 다섯 곳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한다. 그리고 원자료를 둘러싼 분란을 없애기 위해 세초식을 열어 실록 편찬에 쓴 자료들을 모두 물에 씻는다. 세초식이 끝나면 세초연을 열어 지난한 실록 편찬 과정이 끝난 것을 다 함께 축하한다.

 

이렇듯 사관은 내 의견이 곧 역사의 일부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대신의 보복을 받아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도 함께 안고 있었다. 그래서 사관은 말 그대로 ‘목숨걸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한국문화에서 가장 멋지고 존경스러운 문화를 꼽으라면, 필자는 이 ‘기록문화’를 꼽고 싶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멋진 유산인지, 기록이 가지는 위력과 힘이 어떤 것인지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본 서평에서 소개한 내용 외에도 사관과 실록에 얽인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 실려 있으니, 조선왕조실록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