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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업의 시작

아버지의 마지막 여행 15

[우리문화신문=김동하 작가]  아버지는 군대생활을 꽤 영리하게 하셨던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단순하게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군 생활이었을 텐데, 아버지는 그 상황에서도 무엇이 돈이 되는 일인지가 보이셨다고 한다. 미군이 주는 보급품이 그 시절 중요한 공산품이었고, 또 그것을 잘만 활용하면 군생 활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이라 부대가 이동할 때, 혹은 퇴각할 때 수 많은 물품이 버려지거나, 혹은 적군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소각하고 떠나게 되는데, 이것을 잘만 활용하면 당시 꽤 쏠쏠한 돈벌이도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적당히 협조만 해 주면 장교들이 미국이 주는 보급품으로 장사도 많이 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흘러나간 물건들이 부산 국제시장 같은 일명 양키시장으로 가서 일반시민들도 사서 쓰는 미제물건이 되는 것이라 하셨다.

 

어떨 때는 새로 전입해온 보급담당 장교 하나가 너무 무리하게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을 보시고,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셨다고 생각되셨는지 그 장교를 불러서 엄청나게 두들겨 패 줬다고 하셨다. 사실 한참 전쟁 중만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영창을 가거나 엄청난 징계를 당하셨을 텐데, 평소 아버지를 좋아하시던 연대장이 1계급 강등 정도로 사건을 무마해 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후로는 더는 진급을 못 하고 제대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덕분에 당시 꽤 많은 장교가 혜택을 보셨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제대하실 때 사단장이 아버지를 그렇게 붙드셨다고 하셨다. 군무원으로라도 군대에 남아있어 달라고, 군에서 땅도 주고, 동생들 공부도 시켜 주겠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그때 그 제안을 거부한 것을 가끔 후회하곤 하셨다. 하지만 군대에 도둑놈들이 많아서 그 당시에는 참 싫었다고...

 

그런 아버지에게 배운 덕인지 나 역시도 군대에 가서 참 생활을 잘했던 것 같다. 나는 간부식당 행정병이었는데, 물론 음식을 만드는 일에도 관여했지만, 주로 부식이나 식당 물품들을 외부로부터 사는 일을 맡았었다. 이런저런 소소한 일에서부터 제법 굵직한 일까지, 식당 선임하사는 물론, 행정처장이나 인사과 선임하사 등등 부대 내 행정 실세들이 원하는 이런저런 일들을 봐줄 수도 있는 요령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제대할 때, 우리 부대 주임상사와 인사처장이 군대에 남을 생각이 없냐며 은근히 권하기도 했었는데.... 나도 나이가 더 들면 그 권유에 대한 거절을 후회하려나?

 

군대를 제대한 아버지는 당신의 사촌누님 내외가 사시는 강원도 태백에 가셔서 산판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나라, 산천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지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사촌 매형이시던 분이 당시 태백광산에서 일하셔서 그쪽에 가면 무슨 일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가셨는데, 아버지는 체격은 건강하시고 힘도 괘나 쓰시던 분이셨지만, 육체노동을 선호하시지는 않으신 듯했다.

 

항상 일하다가도 몸이 힘들 때면 뭔가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에 더 심취하셨다.

그러나 산판에 나무하고 목재를 다듬는 일에 뭐 대단한 머리 쓸 일이 없으셨는지, 강원도 산판생활은 그다지 오래 하시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당시에는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대도시였던 대구로 나오셔서 지인들과 철공소를 차리셨는데, 그 일에 꽤 재미를 느끼셨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대구는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고, 한국전쟁 이후 그나마 폭격을 받지 않았던 대구는 상당한 공장들이 건재해 있었단다. 그렇게 시작한 쇠붙이 다루는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되었던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나에게 집이란, 항상 쇠 갉아내는 소리, 프레스 기계가 쿵쿵거리는 소리 등등

조용한 분위기의 집이란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추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