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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이 나오기까지 우리 겨레의 노력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4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우리는 매일 한글의 덕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참 좋은 글자구나 하고 느끼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큽니다. 그러나 혹 외국인이라도 만나면 한글을 누가 어떻게 해서 만들었는지, 글자로서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소리를 표기하는 원리는 무엇인지 등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서문을 쓴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이 있어 이런 문제가 없는데 한글에 관해서는 마땅한 책도 없습니다. 앞에서 인류가 5,500년 동안 문자를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지를 보았는데 이 글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어떤 문자생활을 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훌륭한 훈민정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2만 년 전에 정점을 찍고 그 뒤 1만 년 동안 온도가 차차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인류는 해를 쫓아 따뜻한 동쪽으로 이동하여 결국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북쪽의 중앙아시아와 남쪽의 인도 남부로부터 왔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1만 년이 넘는 이 긴 세월을 더 이상 큰 이동 없이 한반도와 인근에서 농사나 수렵으로 살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어 살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 토박이말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토박이말을 가진 겨레는 아마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글자가 없었습니다. 환단고기에 가림토 문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한 유적을 찾지 못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분류대사전 등 수많은 국어 관련 책을 써온 국어학자 남영신 선생은 설사 가림토 문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렇다 할 유적이나 우리의 언어 속에 영향을 끼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우리 글자를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발자취를 보면 수긍이 갑니다.

 

그러니까 2,000여 년 전 한사군을 통해 한자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 조상들은 글자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인 은나라 동이족은 한자의 원조인 갑골문을 만들었지만 3,500년 전 일이었고 또 중국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갑골문은 그 뒤로 1,000여 년 동안 한자로 발전되었으며 공자와 맹자 같은 학자들이 나와 사서삼경 등 찬란한 한학을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글자가 없이 살던 우리에게는 이러한 한자 문화의 도래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조상들도 한자를 배워 아버지는 부친(父親), 어머니는 모친(母親) 등 어휘부터 시작하여 문장 전체를 중국식으로 쓸 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아래 예에서 보듯이 한문서를 그대로 받아들여 쓰고 필요한 곳에서만 한자로 우리말 토를 달아 이해를 도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말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한자를 받아들여 자국의 언어와 혼합하여 편리하게 바꿔버린 일본 조상들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글 전용이 가능한 것은 이런 조상들의 차별화 노력 덕분일 것입니다. 아래 예를 참고하십시오.

 

“君子는 懷德(회덕)하고 小人은 懷土(회토)하며 君子는 懷刑(회형)하고 小人은 懷惠(회혜)하니라.(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을 생각하고 소인은 혜를 생각한다.)

 

물론 훈민정음이 생긴 것은 불과 600여 년 전이라 천년이 넘도록 이런 토나 어미는 한자로 표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구결(口訣 입겿 또는 입결)>이었습니다. 곧 아래에 보인 것처럼 한자음으로 우리말 발음을 흉내를 내 표기했던 것입니다. ‘는’과 ‘은’을 한자 ‘隱’(숨길 은)으로 쓰고 ‘爲’자를 훈을 따라 하로 읽어 하며는 ‘爲彌’로, 하고를 ‘爲古’로 쓴 것입니다. 남영신 선생에 따르면 우리 고서에 이런 입겿문자들이 90여 개나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君子隱 懷德爲古 小人隱 懷土爲彌 君子隱 懷刑爲古 小人隱 懷惠尼羅“

 

그 뒤 ‘隱’자는 변을 따 ‘阝’로 표기하였고 ‘爲’자는 행서체(为)의 머리부분을 따 ‘ソ’로 표기했습니다. 이런 글자들은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로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입겿문자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이두>입니다. 이두에서는 한자의 음뿐 아니라 훈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위에서 본 ‘爲彌’와 ‘爲古’를 ‘하며’와 ‘하고’로 읽는 것은 이두식 표현입니다. 아래는 문장 전체를 아예 우리말 어순으로 바꿔 쓴 이두의 예입니다. 여기서 ‘作節’을 ‘지을 때’, ‘法以’를 ‘법’으로로 썼음을 볼 수 있습니다.

 

”南山新成作節 如法以作後崩壞者“(남산 신성을 지을 때, 만약 법으로 지은 뒤 3년에 붕괴하면)

 

 

그러나 입겻과 이두를 쓰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말을 좀 더 완벽하게 표현하려는 노력이 <향찰>로 이어졌습니다. 향찰에서는 한자를 소리글자로 써서 우리말의 표현에 한 걸음 더 다가갔습니다. 신라시대 처용가에 나오는 ‘밤드리’라는 말을 ‘夜入以’로 표기한 것이 한 예입니다.

 

이상은 이두나 향찰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말을 글자로 표현하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조상들의 고충을 알고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 봅니다. 세종 8년까지는 법률을 정비하고 10년에는 효행록을 편찬하여 백성을 일깨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한자를 몰라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종14년에는 효자, 충신, 열녀의 행실을 그림으로 그린 삼강행실도를 전국에 나눠주었지만 범죄가 크게 줄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백성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그들이 읽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40살이 되던 세종 19년에 신하들로부터의 항의를 무릅쓰고 건강을 이유로 조정을 세자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필시 이때부터 언어연구에 몰두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6년 뒤 드디어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3년 동안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 책을 펴내 실제 사용 경험을 쌓은 뒤 세종 28년 1446년에 반포하게 됩니다.

 

훈민정음 이야기는 다음에 좀 더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