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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과 소통하기

중은 죽어서 산이 되고, 산은 다시 중을 낳는다.
산사에서 띄우는 편지 4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아래 줄임)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의 선시다. 선시에서 나옹선사는 "산이 말을 한다."라고 했다. 나옹선사가 산과 소통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옹선사뿐만 아니라 자연과 소통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산을 향하여 마음의 문이 닫혀 있으면 불가능하다는 것도 되고, 누구나 가슴을 열고 산을 바라보면 산과 대화가 어느 때고 가능하다는 뜻도 된다.

 

내가 새벽 예불을 마치고 법당문을 열고 나오면 눈앞에 산이 우뚝 서 있다. 비록 낮은 산이긴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산은 뽀얀 안갯속에서 서서히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낼 때쯤, 나는 두 손 모으고 앞산을 바라보는 것이 그날 일과의 시작이다.

 

며칠 전 단비가 내린 뒤 산은 생기를 되찾았다. 온갖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고 지고, 온 산은 연한 연두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자기들만의 독특한 색깔로 모습을 변화시켜가고 계절의 아름다움을 부지런히 연출해 내고 있다. 그 가운데 봄 산은 다양한 꽃과 연한 초록빛 나무들이 어우러져 다양한 모습으로 모자이크해가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나는 사계절 가운데 4월의 산을 정말 좋아한다. 왜냐면 4월의 산은 생동감과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마다 산은 묵언으로 나에게 새로운 감성과 활력을 내 가슴 속에 가득 채워주기 때문이다.

 

산은 스승이자 자비로운 어머니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살찌우게 하여 산 짐승과 산새들에게 집과 양식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겨울 추위가 오면 옷을 벗어 땅속 여린 생명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어머니가 된다.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 봄이 오면 산은 어김없이 또 꽃을 피워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든다. 그와 같은 자연의 순환 속에서 모든 만물은 아무리 급해도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산과 함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나눔과 베풂을 산에서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산은 키가 작은 나무, 키가 크고 우람한 나무, 그리고 온갖 잡목과 이름 모를 잡초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산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는 잘남과 못남이 어디 있겠으며, 가난하고 부유함이 어디 있겠는가. 또 좋고 나쁨이 어디 있고 너다 나다 다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선악(善惡)을 평정하는 극락과 지옥은 또 어디 있겠는가.

 

산은 인내와 거룩한 자비를 보여준다. 천둥과 폭풍, 거친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넓은 가슴으로 많은 생명을 감싸주고 있으며, 세속의 모든 허물도 지워주고 대죄를 지어 산에 묻히는 자에게도 편안한 자리를 내어준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무분별한 개발과 벌목, 오염과 산불로 산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그런 아픔 속에서도 산은 무거운 침묵을 하고 화두(話頭)를 들고 있다. 훗날 인간이 고스란히 받게 될 재앙을 걱정이나 하는 듯.

 

사람들은 산이 좋아 산을 찾지만, 산의 목소리에는 무관심이다. 그저 산만 가면 되고 건강과 쾌락만 즐기려는 속셈들이다. 산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심오한 말씀을 들으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산은 우리의 생명이다. 산은 우리의 몸이다. 산이 무너지면 우리의 생명도 무너진다. 산이 온전히 잘 보존되어야만 수많은 생명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고, 환경오염과 질병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다.

 

중국 북송 시대 때의 이야기다.

 

그 당시 대 문장가이자 학자인 소동파는 옥천사에 도력이 높은 선사가 있다고 해서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찾아갔다. 소동파는 스님(삼총)께 "스님이 도력이 높다고 해서 설법을 들으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자, 스님께서 말하기를 "당신은 어찌 무정설법(無情說法:일체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을 말함)을 놔두고 유정설법(有情說法:인위적으로 꾸민 말)만 들으러 다니는가?"라고 말하였다. 그 말에 소동파는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돌아서서 귀가할 수밖에 없었고, 온통 머릿속에 스님이 던진 말이 풀리지 않아 고심하며 야밤 길을 말이 끌고 가는 대로 갈 뿐이었다. 그런 자신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산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웅장한 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단박에 무정설법의 진면목(眞面目)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서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고 깨우침을 게송으로 읊었다.

 

溪聲便是 長廣舌(계청변시 장광설)

山色豈非 淸淨身(산색기비 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 擧似人(타일여하 거시인)

 

본래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이었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모든 일체 만물의 소리는 진실한 진리의 설법이 아닐 수 없고, 산속에 있는 소나무, 잣나무, 바윗덩어리 온갖 모양들은 그대로 모두 다 부처님 모습이며,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진리의 법음일진데, 내일 날이 밝으면 이 참뜻(眞面目)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다 전할까?.

 

산뿐만 아니라 모든 형상과 사물들은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생명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인간이 영특하다고 하여도 어찌 그 모든 존재들의 값어치를 측정하고 우월하다고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인가.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얼굴을 스치는 선들바람, 시원하게 뿌려주는 단비,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노니는 산새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잠시 느끼고 좋아할 따름이지 사실, 그 진면목을 깊이 있게 헤아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산과 소통하기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산이 좋아 산을 간다고 해서 산을 다 알고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진실로 산을 사랑하고 산을 알고 산과 소통을 하려면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산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소동파처럼 마음이 열려야 비로소 산을 알고 나를 알 것 같다.

 

겨울산은 옷을 벗고 시원하다고 한다.

하얀 눈을 덮고 포근하다고 한다.

 

중은 염의삭발(染依削髮)*을 하고는 시원하다고 한다.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벗고서 가볍다고 한다.

 

산은 옷을 벗고 비로소 하늘 기운을 담아

땅속 깊이 스며들게 하고

중은 산의 기운을 먹고 염불을 한다.

 

중은 산이 쏟아내는 법음(法音)을 몸에 모셔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미망의 속계에 쏟아낸다.

 

중은 죽어서 산이 되고

산은 다시 중을 낳는다.

 

그래서 중은 산에서 산다.

산과 중은 한 몸이기에.

                              - 일취 시편 〈산승〉에서

 

* 염의삭발(染依削髮) : 흐린 색깔로 물들인 옷에,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주 짧게 깎은 머리(출가한 승려들의 자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