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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외국어 표기하는 법을 만들어야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 12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세계 으뜸 글자의 부끄러운 성적

 

우리는 한글이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울 뿐 아니라 어떤 언어의 발음이라도 표기할 수 있는 세계 으뜸 글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정인지도 훈민정음으로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도 표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글은 정말 다른 문자들이 따라 올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세계 으뜸 글자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일본사람들과 함께 세계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것이 한글의 표기 기능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fan을 우리는 ‘팬’이라 하고 일본사람들은 ‘후앙’이라고 하니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발음이 몇 개 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나라 밖에 나가면 입을 열지 못하고 맙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나오고도 미국이나 호주처럼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살게 될 때 말이 안 통해 노동일이나 말이 별로 필요 없는 서비스업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이를 누구에게 호소해야 합니까? 개인 당사자의 복지 문제를 넘어 국가 경쟁력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영어뿐이 아닙니다. 중국어를 배우려면 먼저 로마자로 된 병음부터 배워 중국어 발음을 병음으로 표기해 가며 배우고 있습니다. 중국어 교사들은 한글로 중국어 발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보고 세종대왕이 얼마나 실망하실까요?

 

세종대왕은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듬해 신숙주 등에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여 《동국정운》이라는 자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명나라의 자전, 홍무정운에도 훈민정음으로 발음 표기를 담아 《홍무정운역훈》 이란 책까지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때 신숙주를 중국에 6, 7차례 배우러 보냈다 하니 세종대왕이 중국어 발음 표기에 얼마나 관심을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발전은 고사하고 아예 포기하고 로마자 알파벳을 빌려 쓰다니요. 이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훈민정음의 혼을 물려받지 못한 한글

 

훈민정음은 인간이 어떤 발음을 할 때 구강의 구조를 가장 간단한 도형 - 점과 원, 그리고 직선 -으로 그려내는 본보기입니다. 그 도형이 구강의 구조를 간단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며 배우기도 쉽습니다. 나아가서 구강의 모양이 조금씩 변해 소리가 달라짐에 따라 그 도형도 조금씩 변화하는 모양을 보이도록 하여 어떤 변화음도 쉽게 묘사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훈민정음은 ‘발성표현(發聲表現)’ 모형이었으며 이 모형으로 우리 말을 표현하기 위한 도형, 곧 홀소리와 닿소리(자모)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자모는 소리에 따라 얼마든지 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훈민정음의 고갱이입니다. 정인지가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불행하게도 당시는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이어서 한힌샘 주시경은 훈민정음의 고갱이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 쓰이고 있던 훈민정음 자모 가운데서 우리말 표기에 필요한 것만을 골라 한글이란 이름으로 엮어 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강조한 바대로 그는 나라가 망하기 전에 빨리 한글을 정리하여 보급해야 한다는 절박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힌샘에게 외래어 표기 문제는 사치

 

이런 여건에서 외국어 발음을 정확히 표기하려는 것은 사치였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힌샘의 국어문법에서는 외래어 표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외래어 표기 규정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소리가 나는 대로 적는다’, 둘째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지 않는다’ 였는데 더 이상의 부연 설명도 없었습니다. 이 조항은 현재 국어기본법 한글맞춤법에 규정되어 있는 외래어 표기법의 핵심 내용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은 허상, 외국어 표기법으로 대체하자

 

망국 직전이었던 한힌샘의 시대와 세계 10대 강국이 된 대한민국의 시대는 다릅니다. 특히 외국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당시는 과거를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때이고 지금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때입니다. 한글은 필요하다면 훈민정음도 뛰어넘어야 한다는 각오를 둬야 합니다. 당연히 훈민정음의 고갱이를 이어받지 못한 개화기 한글의 테를 벗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다음 두 가지를 호소합니다.

 

1. 외래어가 무엇인지 이해하자

외래어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말이 된 외국어 어휘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말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어나 일본어 어휘도 들어와 우리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말이 되고 나면 별도 취급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개념입니다. 고장말(방언)처럼 필요하면 표준어를 정해 사전에 올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말이 되기 전에는 외국어로 취급하면 됩니다.

 

2. 외국어 표기법을 언어별로 만들어 쓰자

외래어와는 달리 외국어 표기법은 꼭 필요합니다. 외국어를 배우려면 그 언어의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언어마다 한글로 외국어를 표기하는 법을 만들어 공식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IPA’라는 국제 발음기호 가운데 필요한 것을 골라 썼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IPA는 불편한 점이 많아 미국의 사전에서도 선택적으로 사용됩니다. 한글로 IPA보다 더 정밀한 발음표기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상기한 대로 훈민정음의 원리를 이용해 기본 자모를 합자하여 쓸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