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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가 불교의 진언(眞言)을 외우다

이뭐꼬의 구도이야기 14 (금산정사 방문기8)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거금도 부두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우리는 이틀 전에 전화를 드렸고 또 절이 부두에서 별로 멀지 않다고 하여 전화를 다시 하지 않고 찾아갔다.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무려 네 사람이나 붙잡고 계속 길을 물어물어 갔다. (주: 당시에는 차에 길찾게-내비가 없었다.)

 

조그만 골목길을 지나 논을 지나고 호젓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 겨우 찾아가니 송광암이라고 쓰인 절이 나온다.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금산정사가 어디냐고 계속 물었는데, 송광암이 나오다니. 주차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토종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보더니 일어서지도 않고 몇 번 짖다 만다. 참으로 느긋한 강아지였다. 인기척 하나 없는 조그마하고 조용한 산사였다.

 

옆으로 돌아가니 젊은 비구니 한 사람이 보인다. 연담거사가 공손하게 합장하고 금산정사가 어디냐고 물었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무표정한 비구니는 자기는 잘 모르겠으니 마을로 내려가 물어보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섬에 절이 두 곳뿐이라는데 자기는 다른 절의 위치를 모른다?

 

잠시 원망스러운 생각이 스쳤다. 수행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불친절할까? 곧이어 마음을 바꾸었다. 아무려면 어때.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친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친절한 사람이 있어야 친절한 사람이 돋보이지 않겠는가! 이왕 온 김에 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한쪽에 수국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우리는 수국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다시 산길을 내려가 마을을 지나고,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금산정사 비석이 길가에 보인다. 금산정사가 있는 마을 이름이 동정마을인가 보다. 이제는 제대로 찾아가는가 보다. 좁은 마을길을 지나 밭 사이로 난 길을 조금 가니 웬 임시 건물 하나가 나오고 간판도 없이 금산정사라고 페인트로 쓰여있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그리던 아름다운 산사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이라는 것이 항상 꿈에 속아 사는 것인가? 꿈에서 깨어나 우리는 임시 건물을 돌아 입구를 찾았다. 문간 아래 고무신은 보이는데 스님! 스님! 하고 외쳐도 아무도 나와 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쪽에는 임시 법당이 마련되어 있고 한쪽에는 부엌, 한쪽에는 집으로 말하자면 거실 같은 공간이 있었고, 한쪽에는 아마도 스님이 쓰시는 방이 하나 보였다. 우리는 부처님께 삼배(三拜)를 올리고 나서 스님 오시기를 기다렸다.

 

연담거사는 나에게 참선하는 가부좌 자세를 시범으로 보여 주었다. 나도 자세를 따라 해 보니 쉽지 않다. 가부좌를 하니 다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연담이 말하기를 “참선의 목적은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연담은 금방 선정에 빠져들었다. 연담거사는 꼼짝도 안 하고 눈을 감고 앉아 있다. 흡사 한 개의 바위가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 있다가 다리가 아파서 그만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절 주위를 돌아보았다.

 

절 주위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었다. 과수원도 있고, 밭도 있고, 언덕도 있고, 시냇물 소리가 나는 쪽으로 올라가 보니 한우 두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가 줄에 매여 있다. 어미 소가 나를 보더니 ‘음매애-’ 하고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정겨운 소리였다. 한우는 그 바라보는 눈이 매우 선량한 느낌을 준다. 그 선량해 보이는 커다란 눈 때문에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는가 보다.

 

조금 더 가니 흑염소 두 마리가 줄에 묶여 있다. 그 옆에는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다가 그만 사라지고 마는 개천이 있었다. 나는 개울물에서 세수하였다. 물이 차고 시원했다. 덤불에서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들렸다.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았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혼자서 한참 쏘다니다가 절에 돌아오니 웬 찬송가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상하다. 절에서 찬송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참선을 끝낸 연담거사가 나지막하게 찬불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 귀에는 그 찬불가가 찬송가와 비슷하게 들렸다. 불교의 현대화 작업으로서 절에서도 찬불가를 만들었는데, 피아노 반주에 곡조 자체가 기독교의 찬송가 비슷하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찬불가라면 가야금 반주에 국악 가락이 나와야 제격이 아닐까?

 

현정 스님은 여전히 안 보인다. 마침 절 아래에서 밭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니 스님은 가끔 조금 떨어진 숲속의 평상에서 참선하신단다. 우리는 풀밭을 지나 평상까지는 찾았으나 스님은 없었다. 우리는 평상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스님을 기다렸다.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다.

 

연담거사는 기다리기가 지루했나 보다. ‘노느니 염불이라’고. 현정 스님은 오시지 않고 시간이 있으니 진언(眞言)을 가르쳐 주겠단다. 우리가 몸을 씻을 때 똑같은 물로 계속 씻듯이, 영혼을 씻을 때 쓰는 말하자면 영혼의 목욕물 같은 것이 진언이라고 한다. 연담거사는 염주를 꺼내더니 108개 염주 알 하나하나에 ‘옴 마니 반 메 훔’이라고 외면서 1,000번까지만 하잔다. 어떻게 1,000번을 세느냐고 물어보니 염주가 한 바퀴 돌아가면 큰 구슬이 나오므로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가 다 펴면 염주가 열 번 돌아간 것을 쉽게 알 수 있단다. 나는 잠깐 속으로 망설였다. 아무리 내가 개방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기독교 신자로서 진언까지 왼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

 

나는 다른 종교를 대할 때 차이점보다는 같은 점을 찾는 나쁜 습관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불교와 천주교는 특히 공통점이 참 많다. 스님들이 입는 쑥색 가사는 신부님들이 입는 검은 제복과 비슷하고, 염주는 천주교의 묵주와 비슷하고, 제사의식에서 향을 피우는 것도 비슷하다. 절에 있는 보살의 입상은 성당에 있는 여러 성상과 비슷한 느낌인데, 신도들이 동상 앞을 지나며 절하는 모습도 비슷하다.

 

천주교와 조계종의 성직자 독신 제도도 비슷하고 성직자 지망생이 나날이 줄어드는 추세도 비슷하다. 불교의 명상은 천주교의 묵상, 또는 요즘 개신교에서도 유행하는 QT(Quiet Time이라고 해서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와 비슷하다. 또한 교리적으로도 불교 신자들이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는 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성모마리아에게 열심히 기도하는 것과 비슷하며, 미륵불 사상은 메시아 사상과 통하는 면이 있다.

 

어쨌든 나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힘입어 용기를 내서 연담거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앉아 두 사내는 진언을 큰 소리로 외기 시작하였다. 말이 1,000번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진언을 시작하였으니 끝을 내기로 결심한 나는 행여 질세라 눈을 감고 큰 소리로 ‘옴 마니 반 메 훔’을 따라 외쳤다. 8번째로 손가락을 폈는데, 연담거사가 진언을 멈춘다. 웬일인가 하고 눈을 떠 보니 거기에는 현정 스님이 와 계시지 않는가? 와, 진언이 효과가 있기는 있네! 나는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