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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

《야만의 시간》, 김종철, 진실의힘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48]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 선배 이인람 변호사가 《야만의 시간》이란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카톡 문자를 보내오셨습니다. 선배는 하늘이니까, 명령을 어기면 안 되겠지요? 책의 부제는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입니다. 한통련이 1973년 설립된 단체이니까,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이라면, 지금까지도 한통련은 반국가단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네요. 이런! 그동안 한통련 연계된 재일교포 간첩사건들이 재심에서 무죄가 나와, 한통련 문제도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제가 무심했었네요.

 

 

한통련은 1973년 8월 15일 재일교포들이 설립한 단체입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집권을 꾀하는 때라, 자연히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뜻있는 재일교포들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단체를 만든 것이지요. 설립 당시에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는데, 1989년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한통련은 출범 당시부터 김대중 대통령(DJ)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체입니다. 아니 한통련 설립에 DJ가 깊숙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DJ는 그 무렵 교통사고로 다친 고관절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갔었는데, 6일 뒤에 10월 유신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교통사고란 DJ가 1971년 5월 총선 유세 중 당한 교통사고를 말합니다. 당시 DJ가 탄 승용차를 대형트럭이 들이받았는데, 고의성이 의심되는 의문의 교통사고입니다.

 

10월 유신이 발발하자, DJ는 귀국을 포기하고 맨 먼저 유신 반대의 깃발을 올립니다. 그리고 뜻있는 재일교포들과 함께 한민통을 만듭니다. 그런데 사실 한민통은 일본보다 미국에서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DJ가 유신독재에 맞서 싸울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미국에도 갔다가 1973. 7. 6. 미국에서 먼저 한민통을 만든 것입니다. DJ는 유럽에도 한민통을 만들 생각이었답니다. 그렇지만 한민통의 중심은 일본이지요.

 

그런데 처음에 조직 결성은 난항을 겪습니다. DJ가 ‘대한민국 절대지지’, ‘선민주 후통일’, ‘조총련과 선 긋기’라는 조직 결성 3원칙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지요. DJ로서는 이 3원칙을 고수하지 않으면, 한민통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는 반국가단체로 공격받을 것을 염려한 것이지요. DJ가 그렇게까지 하였는데도 빨간색으로 덧칠 당하는 것을 피하지 못하였는데, 위 결성 3원칙마저도 지키지 않았으면 그후 DJ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전두환은 DJ 사형 집행을 관철시켰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민통 출범 일주일을 앞두고 DJ가 사라졌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정요원에 납치된 것입니다. 대표를 맡기로 하였던 DJ가 납치되었으니 한민통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연히 DJ 구출을 위해 일본, 미국의 관계요로에 DJ 구명을 호소하는 등 총력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DJ를 대한해협 바다에 수장하려던 중정요원들은 DJ를 한국으로 데려왔고, 이후 DJ는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지요. 아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제여론에 굴복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후 DJ 대통령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라는 명예보다는 살인자라는 오명이 더 앞섰을 것입니다.

 

책의 부제에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이라고 하였지요? 사실 한통련 조직원들이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이런 재판에서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로 선언된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조작으로 판명된 재일교포 간첩 김정사 사건에 배후단체로 한통련이 지목되고, 그 재판에서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혔습니다.

 

이후 이렇게 낙인찍힌 한통련이 유사한 재일교포 간첩 사건 재판에 반국가단체로 등장하면서 한통련은 반국가단체로 굳어진 것이지요.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로 굳어진 데에는 언론의 역할도 컸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일보가 앞장섰습니다. 당시 대부분 신문은 정보기관에서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쓰곤 했지만, 조선일보는 공안기관보다 한발 앞서가는 등 행보가 남달랐습니다. 그 중심에 허문도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 허문도는 권력 실세에 빌붙을 수 있었겠지요.

 

김정사 사건에서 한통련이 반국가단체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은 영사 증명서와 자수간첩 윤효동의 증언입니다. 영사증명서는 대사관에 근무하는 정보기관원이 작성하는 증명서입니다. 물론 영사 명의로 발급되겠지요. 하하! 중앙정보부가 수사하여 검찰을 거쳐 기소하는데, 그에 대한 증거가 정보기관원이 작성한 영사증명서라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닙니까? 그리고 자수간첩 윤효동의 증언도 사전에 중정이 짜맞춘 것에 따른 증언입니다. 실제로 윤효동의 증언은 그가 1년 전에 정보부에서 한 진술 내용과 일시, 장소 등이 맞지 않는 등 모순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통련이 김정사 사건에서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혔다고 하였는데, 김정사를 비롯한 재일교포, 교포 유학생은 중정이나 보안사에서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탐나는 먹잇감이었습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이들로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북한에 대한 관념이 국내인들과는 좀 다를 것이고, 조총련과 접촉하는 데에도 거부감이 덜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별 생각없이 한 행동이 정보부 요원들에 의하여 간첩행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사요원들은 간첩 혐의 인지하기 전에도 치안본부 신원조사과에 들러 재일동포가 여권을 만들 때 제출하는 신원 서류를 뒤져보면서, 이른바 배후가 불온한지 등의 특이사항을 찾곤 하였다고 합니다. 보안사의 간첩 조작 실태를 폭로하는 김병진의 책 《보안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생각하면 1984년의 유학생 간첩 세 명은 수사과의 사정상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오희명 과장의 진급 문제가 세 외근계를 간첩 조작에 광분하게 압력기로 작용한 것이다. 오희명 과장은 내근 사무실에 수사과 전체를 모아 “제군의 상사는 누군가. 이 오희명 중령을 대령으로 부르게 하기 위해 제군들은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고 공개수사에 들어가기 전에 일장 연설을 떠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재일 한국인 유학생 세 명이 간첩으로 조작되려고 할 즈음 분실 강당에 제단을 차려놓고 고사까지 지냈다."

 

고사까지 지냈다니, 이런 개XXX! 권력의 주구들에게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이렇게 암흑의 시절에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은 그 시절이 가고난 뒤 재심에서 속속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통련에 씌워진 반국가단체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한통련 사람들은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만세를 불렀습니다. DJ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신중한 DJ는 이들의 국내 입국을 제한적으로 풀어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DJ는 왜 그랬을까요? 한통련이 그 이후 성격이 변화되었기 때문일까요? 사실 한통련은 그후 통일을 우선하다보니 북한에도 다녀오고, 북한에 대한 비판보다는 민족을 우선하면서 오해받을 행동도 하였습니다. 《야만의 시간》 저자 김종철 선생도 책에서 한통련이 해명해야 할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라면 DJ의 레드 콤플렉스 때문인가? DJ 자신이 이 때문에 대한해협에 수장당할 뻔하였고, 전두환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은 피해자인데, 오히려 그런 것이 레드 콤플렉스로 작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DJ는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줄 경우 또다시 자신에게 쏟아질 빨갱이 화살이 두려웠을까? 아무튼 여러 의문이 드는데, 아마 당시는 DJP 연합정권이었으니, 이런 것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DJ가 한통련 복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국내 각계의 ‘행동하는 양심들’ 100여 명이 2000년 12월 세종문화회관에 모여 한통련 대책위를 결성합니다. 명단을 보니 이기욱(이인람 변호사 개명 전 이름) 변호사가 집행위원장으로 나오네요. 아하! 이래서 이인람 선배가 더욱 《야만의 시간》을 보라고 강추하였던 것이구나.

 

이 선배는 1993년 김삼석ㆍ김은주 남매 간첩 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한통련이 억울하게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선배는 이렇게 말하네요. “사건을 다루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한통련이 어떤 조직인지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그 후 한통련 사람들을 일본에서 만나 그들이 한국 민주화운동을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듣고 더 잘 알게 됐죠.”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한통련은 진실 규명 신청을 합니다. 그런데 한통련의 신청서는 하필이면 국정원에서 파견나온 조사관에게 배당됩니다. 그리고 한통련의 신청서는 이 조사관의 책상 서랍에서 나올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국방부과거사위원회가 진실화해위원회에 한통련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합니다. 당시 국방부과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이 선배였습니다. 이 선배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김정사 사건을 조사하면서 진실화해위원회에 한통련의 재조사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바로 한통련이 김정사 사건에서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히기 시작했으니까요. 김정사 사건 보고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사건 공판에서 자수 간첩 윤효동은 ‘한민통이 북한과 조총련의 사주에 의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민통 조직국장 곽동의를 포섭하여 1970년 4월경 입북시킨 바가 있다’라고 증언하였는데, 윤효동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거물급 간첩으로 조작되었음이 확인되어, 한민통과 곽동의에 대한 윤효동의 공판 증언은 신빙성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사법부는 이 사건 판결에서 처음으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였는데, 판결문상에 한민통이 반국가단체인 이유나 근거나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단지 “북괴와 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자금 지원을 받아 목적 수행을 위해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한민통이 북한과 연계되어 남한 사회의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국가 변란을 기도하거나 정부를 구성하거나 정부를 사칭한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김정사의 간첩 혐의와 중형을 선고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선배의 노력으로 「한민통 반국가단체 규명사건」 보고서가 마침내 완성돼, 이명박 대통령 때인 2010년 6월 30일 진실화해위원회 전원위원회에 상정됐습니다. 그러나 위원회에서는 이는 법원에서 재심으로 다룰 문제라며 각하하였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김정사가 재심 신청을 하였을 때 - 이인람 선배가 변호인이었습니다. - 김정사에게는 무죄를 선고하면서, 한통련 반국가단체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재심 신청한 김정사의 유무죄만 판단하면 되지, 굳이 쟁점이 아닌 한통련 반국가단체 여부에 대해서까지 판단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진실화해위원회와 법원이 서로 상대방에게 공을 넘기면서 판단을 외면한 것이네요. 그러면 한통련 당사자가 직접 재심 청구를 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한통련 당사자들이 직접 재판을 받은 적이 없기에 재심 청구 자격도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진실화해위원회와 법원이 핑퐁게임을 하는 바람에 한통련의 반국가단체 혐의는 지금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선배님!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한통련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형님이 한통련에 덧씌워진 반국가단체 혐의를 벗기기 위하여 노력하고 계시는데, 새해에는 꼭 원하는 결과 이루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