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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성창순 명창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713]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도 잃은 노은주는 깊은 슬픔에 빠져 판소리와 단절하려 했으나 그에게 있어 판소리와의 결별은 불가능한 일임을 확인하게 되면서 성창순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노은주의 소리 공력이나 성실도를 인정한 성창순 명창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소리 공부한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전수자(傳授者)과정 이후에 이수자로도 당당하게 인정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수자(履修者)란 무형문화재 해당 종목의 수련 과정을 마치고, 공식적으로 전문가 길에 들어선 사람이란 뜻이며, 다음 단계가 ‘전승교육사’로 예능보유자(藝能保有者) 반열에 오르기 직전 단계라는 이야기, 문화재법은 이수자들에게도 전승교육사와 함께, 예능보유자 선정에 도전할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포기하려던 소리공부에 다시 불을 붙여 준 성창순은 어떤 명창인가?

노은주의 진심이 담긴 사모가(思慕歌)의 한 부분이다.

 

“성창순 선생께 공부하면서 저는 3명의 아이를 출산했어요, 선생님은 우리 애들을 참 예뻐해 주셨지요. 선생님이 구기동의 4층 빌라에 살고 계셨는데, 어느 날 갔더니,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어요. 하는 수 없이 2살 된 큰아이는 손을 잡고, 돌도 안 된 쌍둥이들은 업고, 안고, 가방 메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지요. 도착해서 쌍둥이 바닥에 눕혀 놓고, 소리공부를 했는데, 제가 너무 불쌍해 보이셨는지, 애들 키우는데 돈도 많이 들어갈 테니, 지도비(?)걱정은 말라’며 특별히 마음을 써 주실 정도로 따뜻하신 분이셨어요.

 

또 저의 큰아이가 5살 되었을 무렵, 아들이 잘 먹는 음식이라든가 과자와 음료수 등등, 특히 곶감을 냉동실에 챙겨 두었다가 꺼내 주시기도 하고, 아들이 좋아하는 《마법 천자문》이라는 만화로 된 천자문 책도 사 주셨어요.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선생님 신상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고, 때로는 몸이 약해 하성(下聲)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꾼으로서의 감추고 싶은 말씀이라든가, 공연 다니며 겪은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 외에 잊지 못하는 추억담이나 경험담 등을 들려주시곤 했지요. 참으로 자상하시고 고마운 마음씨, 그리고 아이들을 귀여워해 주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노은주가 기억하는 잔잔한 이야기들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성창순 선생님 모시고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공연했던 <소정 성창순의 사제동행>이라는 공연이라든가, 경복궁 내 수정전에서 가졌던 <소정 성창순의 만추(晩秋)>를 비롯한 공연들도 인상에 깊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의 말은 이어가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성창순 선생님과의 인연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어요. 폐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시다가 세상을 뜨신 거예요. 한농선 선생님 보내드리고, 새롭게 인연이 된 성창순 선생님과도 또 이별하게 된, 저는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너무도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성창순 선생님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우며 소리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말입니다.“

 

두 분, 한농선 명창과 성창순 명창의 소리를 간단하게 비교해 본다면?

 

“네, 한농선 선생님이 동편제의 꿋꿋하고 힘찬 소리제라면, 성창순 선생님은 서편제의 아기자기한 창법이 대조적이어서 비교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

 

 

그 이후의 소리 공부는 어떻게 이어졌는지?

 

한농선 선생에게 흥보가를 열심히 배울 때, 남원의 명창, 박양덕 선생에게도 수궁가와 남도민요를 배웠어요. 성창순 명창이 세상을 뜬 이후에는 국창으로 유명한 조상현 명창께도 약 1년 반, <심청가>를 공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문화재 신영희 명창에게도 <춘향가>를 비롯해 <남도민요> 등등 여러 곡을 오랫동안 배웠습니다. 명창 선생님들은 각각의 독특한 창법이라든가, 개성있는 소리의 표출력을 지니고 있어서 배울 점이 참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다. 무릇 소리꾼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각 명창이 지닌 소리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섭렵하고, 이를 상호 견줘 나가는 것은 어쩌면 젊은 소리꾼. 노은주가 해나가야 할 당연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노은주가 장차 더 큰, 그리고 판소리계에 우뚝 설 수 있는 소리꾼이 되는 데 있어, 결정적 영향력이나 경험이 될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