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정식 사장!
오늘 아침에 당신을 가슴속에서 꺼내어 다시 생각했네. 이번 주가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이고 이번 일요일이 부활절인 때문인지도 모르겠네. 지난해 10월 중순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도 가지 못해 매우 미안했는데, 딱 반년이 지나 이제 당신을 다시 불러보는 것이네.

내가 아는 가장 열심히 산 방송기자 이정식. 원래 CBS 기자였는데 언론통폐합 탓에 KBS로 와서는 1985년 여름에 느닷없이 나한테 《북경특파원》이라는 멋진 책을 하나 건네어 나를 놀라게 하고 주눅 들게 한 사람. 일찍부터 책을 써내어 기자가 책을 써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지. 곧 다시 친정인 CBS로 가더니 워싱턴 특파원에다 정치부장에다 사장까지 하면서 경영도 잘하고 책도 많이 써낸 유능한 기자.
사장을 그만두고서는 교수도 하고 다른 미디어 경영도 하면서 어느 틈엔가 노래에 빠져 성악가를 뺨치는 실력으로 몇 번의 콘서트를 열며 노래하는 최고경영자로 유명해졌고 우리 가곡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러시아 문학 기행을 하고, 톨스토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 곁으로 이끌고 온 사람. 당신 덕택에 나도 그 뒤로 책을 많이 쓰게 되었고, 사범대학 출신 언론인 모임의 회장을 당신이 먼저 맡아오다가 나한테 인계했었지.

얼마 전부터 주위에서 하나둘씩 투병 소식이 많이 들려왔고 그 속에 당신도 있었지. 지난해 초 갑자기 당신이 내게 전화해서 그동안 항암치료를 45번이나 받았다며 힘든 투병과정을 밝게 말하기에, 이 사장이 정말 초인적으로 싸워 이겨낸 모양이라고 좋아했는데 결국엔 그게 나한테 한 작별 인사가 되고 말았구나.
이 사장 당신의 별세 소식은 여러 사람들을 착잡하게 만들었지. 집에서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밖에서는 유능한 기자로서 사회를 이끌고 늘 이웃을 돕고 나누는 삶을 살아온 사람, 그런데 갑자기 암이 알려져 긴 시간 고생을 했고 그 고생이 우리 생각으로는 보람도 없이 끝난 셈이니 웬일인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착한 사람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해온 당신에게 하느님은 왜 그런 고통을 주고, 겨우 이겨냈다고 생각하던 때에 다시 당신을 거두어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성경》 구약 편에 들어있는 「욥기」를 다시 펼쳐보게 되었네.
잘 알다시피 「욥기」는 '하느님은 왜 착한 사람이 고통받을 수 있게 하였는가?'를 다루고 있지. 또 선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있는데도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도 제기하고 있고.
그런데 「욥기」는 욥의 세 친구와 욥의 논쟁에서 보듯이, 사람이 겪는 고난과 불행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질 뿐, 절대 개개인의 잘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이 아니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지... 그러나 그렇게 배우면서도 여전히 묻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하느님의 계획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 악인은 잘못을 처벌받고 선인은 잘 돼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하느님의 계획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기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이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전부는 이해할 수 없고, 네가 선하더라도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분명 거기에는 하느님의 선한 뜻이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내용이라고 말하지. 다시 말해서, 욥이 겪었던, 인간의 생각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한 상황도 어떤 선한 뜻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해 끝까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라고 말이지.
우리들이 아는 대로 33살의 청년 예수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먼저 몸을 낮추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는 스스로 재판에 임해 가장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던졌지. 그러고는 사흘 뒤 부활한 것이고. 예수의 부활 과정을 보면 예수도 죽는 고통을 힘들어했고, 신은 예수의 목숨을 구해주지도 않았다. 다만 부활이라는 현상을 통해 무언가 말을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이를 보면 신은 세상의 가난과 굶주림, 미움과 대결, 질병과 전쟁 등에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 개개인이나 한 사회, 국가의 행불행에 대해서도 개입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신의 의지는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인간 개개인에게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것이지. 그렇게 신의 의지를 믿고 신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긍정적인, 혹은 기적적인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가 모두 육신의 부활은 아직 실제로 본 바는 없으니 죽음은 개인의 육신을 거둬가는 문(門)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오히려 예수처럼 신의 뜻을 믿고 신에게 끝까지 의지하면 그에게 부활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은 아닌가? 그 부활은 꼭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신의 뜻을 알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생사문제도 신에게 맡기고 삶을 그의 뜻대로 이끌고 간 것으로 생각되네. 지난해 이맘때 경남 창원에 가서 만난 손양원(1902~1950) 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청년을 아들로 받아들인 분으로 유명한데 그분이야말로 고난과 그것을 이기는 인내를 숙명이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자신이 신의 뜻을 이 세상에 대신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되지.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아내 정양순에게 편지를 해서 "솔로몬의 부귀 및 지혜보다 욥의 고난과 인내를 귀하고 아름답다"라고 하였다지 않는가.
내가 좋아하는 가톨릭 문학가인 일본의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도 만년에 3년 반 동안 암치료로 온갖 고통을 받고 세상을 떴지만, 고통 속에서 신의 의미, 부활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신은 인간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속에 있어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큰 생명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간은 그 큰 생명 속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 속에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계속 살아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은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고요. 이것이 부활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 《남편 엔도 슈사쿠를 말한다》 성바오로 출판사 2004
그 말을 통해 보면 온갖 통증을 인내하고 인내한 이 사장에 대해 신이 완쾌라는 선물을 주지 않은 것은 섭섭한 것이지만, 이 사장이 자신에게 닥친 병고나 환란을 스스로 참아내고 살아간 그 자체가 벌써 신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되네.

12번째이자 마지막 저서인 《톨스토이의 가출》 「후기」에서 이 사장은 이렇게 말했지.
“사람은 모두 자기가 죽을 것을 안다. 그러나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죽음이 임박해서는 모두가 기적을 기대한다. 나는 암 발생 이후 언제나 ‘주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가톨릭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신 어머니의 뜻을 따라, 3년 전 어머니의 유골을 받아 오던 날 나의 시신 기증을 의과대학 측에 약속했다. 나의 육신은 사후에 의대생들의 공부를 위한 해부학 교실에 올려질 터이니 그것도 살면서 세상에서 받은 여러 혜택과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 되지 않을까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당신의 육신은 의료연구를 위해 기증되었다고 이 사장의 아들에게서 들었네. 이로써 이 사장은 살아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많은 빛나는 일을 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힘이 되어주었지. 그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은 몸도 기증했으니 이 사장은 이 세상을 깨끗이 사신 것이지. 그리고 정말로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의 마음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니 그것으로 이미 부활한 것일세. 뒤늦게나마 이정식 사장의 영전에 나의 이러한 마음으로부터의 존경심을 보내니, 저 하늘에서라도 이 마음을 받아주고 다른 후배들을 위해 또 마음을 써주시게.
이 사장은 나에게 늘 기댈 언덕이었고 어깨였네. 당신이 하는 노력과 성과를 보며 나도 자신을 채찍질했지. 나는 이제 부활절 아침에는 당신이 좋아하고 불렀던 ‘You raise me up(당신이 나를 일으켜세우다)’이란 노래를 다시 듣고 따라 부를 것이네. 원래 돌아가신 분 앞에서 불렀다고 하고 지금도 먼저 간 사람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듣는 분이 많다고 하니...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어깨를 내줄 때 나는 강해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내 능력 그 이상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