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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시대에서 하루 살아보기

《조선 사람의 하루》 구완회 글, 임종철 그림, 북스마니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딱 하루를 조선시대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시간을 되돌려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그리고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어떨지 궁금하다. 낯선 도시에 가서 ‘한 달 살기’가 유행인 것처럼, 원하는 시대로 가서 하루를 살아볼 수 있다면.

 

물론 어떤 신분으로 돌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같은 조선 시대여도 임금과 신하, 상민과 노비의 하루는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이 책, 《조선 사람의 하루》는 나랏일에 매진했던 임금과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도승지, 양반가 안방마님, 박 의원, 김 서방, 노비 칠복이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루를 살았는지 재밌게 재구성한 책이다.

 

 

그 가운데 임금의 하루는 한마디로 ‘바쁘다 바빠’였다. 조선은 임금이 제도적으로 편히 쉴 수 없는 나라였다. 임금의 하루는 한양의 종각에 있는 종을 33번 쳐서 새벽을 알리는 ‘파루’와 함께 새벽 5시쯤 시작되었다.

 

일어나면 간단한 죽으로 요기를 하고 웃어른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공식 일과는 조회와 경연으로 시작되었는데, 약식 조회인 상참은 매일 열리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잘 열리지 않았다. 정조 임금은 상참을 연 것이 10번이 채 되지 않을 정도였고, 보통 아침 공부(조강)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7시부터 9시까지 조회와 조강을 끝내고 나면,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는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리고 10시부터 12시까지 관청별로 업무보고를 받았다. 주요 부서는 매일 보고를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부서는 순서를 정해 하루 5개 정도를 받았다.

 

12시 무렵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서는 점심 공부를 1시 30분 정도까지 이어갔다. 1시 30분부터 대소신료를 접견하는 등 오후 업무를 보았고, 4시쯤에는 밤에 궁궐을 수비하는 담당자를 확인하고 그날 쓸 암호를 정해 주었다.

 

저녁 5시부터 7시는 저녁 수라를 들고 다시 저녁 공부(석강)을 하는 시간이었다. 하루 세 번이나 공부하고 업무도 보고, 저녁 7시부터 8시까지는 다시 저녁 문안 인사도 올렸다. 그 뒤로도 상소문이나 책을 읽다가 자정쯤에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너무 일정이 많아서인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진료를 받아도 조선 임금의 평균 수명은 불과 47.2살 정도였다.

 

한편 임금의 비서 역할을 하는 승지들도 아침 일찍 승정원으로 출근했다. 승정원에는 비서실장인 도승지 한 명과 다섯 명의 승지들이 있었다. 좌승지부터 동부승지까지 모두 서열이 있었고, 출근기록부인 공좌부에 도장을 찍고 나면 모여앉아 그날의 할 일을 논의했다.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늘 처리해야 할 문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각지에서 올라온 상소문, 임금의 명령을 승지가 직접 받아 전달하는 전교, 승지가 없을 때 다른 사람이 적은 명령인 비망기, 신하가 올린 글에 임금이 내리는 답인 비답, 임금이 백성 전체에게 내리는 글인 윤음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승정원에는 ‘작환’이라는 특별한 권한도 있었다. 임금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승정원이 나서서 전교를 되돌려보낼 수 있었다.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일도 했지만, 이렇듯 임금의 명령에 제동을 걸 수도 있었으니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p.25)

조선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어. 임금의 명령이라도 법과 도리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면 승정원이 나서서 그 전교를 되돌려 보낼 수가 있었지. 이걸 ‘작환’이라고 불렀단다.

“내 뜻도 여러 승지들의 의견과 같소. 이번 전하의 전교를 작환하도록 합시다.”

이후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신의 명령을 되돌렸다며 왕이 승지들을 벌주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그런 일은 거의 없었어. 왕은 대부분 신하들의 말을 들었지. 다시 같은 전교를 내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면 신하들이 벼슬을 그만두고는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단다. 이것 참, 조선은 왕이 마음대로 하는 나라가 아니었구나.

 

조선시대 안방마님의 하루도 분주했다. 아무리 하인들을 시킨다 해도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넘는 대가족의 대소사를 챙기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까닭이다. 제사와 손님 접대, 살림 장만과 수리, 아이 교육, 재산 관리까지 관여하는 일이 무척 많았다.

 

제사와 손님 접대가 특히 중요한 ‘업무’였다. 제사가 지금보다 훨씬 자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화나 번개글(이메일) 같은 연락 수단이 없던 시절이니 찾아오는 손님도 무척 많았다. 조선 중기 양반이었던 유희춘이 남긴 《미암일기》에는 하루 열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지금처럼 배달주문이나 마트가 없던 시절이니 손이 많이 갔다.

 

노비의 경우 사노비와 공노비, 주인집에 같이 살았던 솔거노비와 멀리 떨어져 사는 외거노비의 삶이 꽤 달랐다. 보통 공노비보다 사노비가 훨씬 힘들었고, 외거노비보다 솔거노비가 훨씬 힘들었다.

 

조선 시대 노비들은 혼인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재산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외거노비는 멀리 떨어져 농사를 지으며 주인집에 보내고 남은 곡식은 자신이 모두 가질 수 있었기에 재산을 많이 불리기도 했다.

 

성종 임금 때 충청도에 살던 임복이라는 사노비는 흉년이 들었을 때 구휼미로 무려 2천 섬의 곡식을 내놓기도 했다. 이 노비의 재산은 모두 8천 섬이었는데, 그 시절에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임금의 공식 주치의인 ‘어의’의 하루도 만만치 않았다. 정조 시절 유명한 어의였던 피재길은 웅담으로 ‘웅담고’라는 고약을 만들어 정조의 종기를 사흘 만에 치료한 뒤, 의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어의가 되는 벼락출세를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원래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였던 백광현은 종기로 아픈 사람에게 말을 침으로 치료할 때 썼던 방법을 시도해보고 효험을 보았다. 그는 이를 잘 발전시켜 신기한 방법으로 종기를 치료하는 명의가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궁궐의 어의까지 되었다.

 

누구보다 치열했던 조선 사람들의 하루. 이런 나날이 모여 인생이 되고, 또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하루’의 의미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이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살펴보면 역사가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임금과 신하, 상민과 노비의 하루를 다양하게 보여주며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는 이 책은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이 읽어도 새롭게 알게 될 사실이 참 많다. 조선에서의 하루를 체험하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