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황과 이이.
우리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학자이자 관료였던 두 사람은, 놀랍게도 동시대 인물이었다. 물론 이황이 서른다섯 살 연상으로 아버지뻘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며 교유했다.
정춘수가 쓴 이 책, 《이황과 이이의 공부 대결》은 두 사람이 걸었던 길을 보여주며 서로 비슷했던 점과 달랐던 점을 톺아낸다. 수백 년이 지나 후손들이 쓰는 지폐의 주인공이 될 만큼 지대한 영향을 자랑하는 이황과 이이, 두 사람이 추구했던 삶의 지향과 행적을 견줘보는 재미가 있다.

우선 둘의 공통점은, 공부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는 점이다. 양반들의 진로가 ‘과거 합격’으로 정해져 있던 조선시대,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과거에 합격해서 조정에 출사한 이들은 모두 수재였지만, ‘합격을 위한 공부’만 했던 이들은 출사한 뒤에는 공부와 멀어졌다.
그들이 위대한 학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조정에 출사한 뒤에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학문을 연마한 덕분이다. 학문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그 바탕이 되었다. 사실 벼슬이 더 적성에 맞지 않았던 쪽은 이이보다 이황이었다.
이황이 1536년, 벼슬살이를 위해 한양으로 올라온 뒤 3년째 되던 해에 쓴 시 「봄을 느끼다」의 한 구절을 보면 막막한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난다. 서른넷, 적지 않은 나이에 비로소 벼슬을 시작했지만, 막상 시작한 ‘직장생활’은 꿈꾸던 것과는 적잖이 달랐던 모양이다.
(p.72)
세월이란 불현듯 흐르고 멈추지 않으니
속 깊은 서글픔 말로 다하기 어렵네
서울에서 보낸 지 삼 년 봄을 맞으니
내 모습은 망아지 수레에 매여 있구나
아득히 지난 세월 마침내 얻은 이익이 무엇이던가
그는 어쩌면 이때 벌써 ‘퇴사’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준비도 필요했고, 늦게 시작한 벼슬살이를 일찍 그만두기에는 상황이 여의찮았다. 적성에는 잘 맞지 않았지만, 이황은 어찌저찌 10년을 버티어 냈다. 벼슬에서 물러날 결심을 어느 정도 굳혔을 때는 그의 나이 마흔세 살 때였다.
그때는 아들의 과거 합격을 누구보다 기뻐하던 홀어머니도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났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넉넉해진 시점이었다. 이황은 명종 대에 들어서는 더 이상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임금이 부르면 마지못해 나갔다가 사직을 반복했다. 이렇게 나아가고 물러난 횟수만 명종 대에 대여섯 번에 이르렀다.
그가 도산으로 물러나 머물 곳을 마련한 뒤에 지은 시를 보면, 더는 직장생활에 매이지 않고 좋아하는 학문만 마음껏 하게 된 홀가분함이 잘 드러난다. 그때부터 오늘날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p.75)
개울물 바위 사위 초가집 옮겨 지으니
바위틈에 붉은 꽃 어지러이 피어나네
지금껏 오락가락하다 이미 때가 늦었으나
아침에 밭 갈고 저녁에 책 읽어 즐거움 끝이 없어라
이이는 훨씬 더 현실 참여적이었다. 그는 정치가 어지럽던 명종 때 물러난 이황의 처신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임금이 바뀌고 선조가 즉위했는데도 계속 물러나려는 이황에게는 불만이 많았다. ‘나라 걱정’은 하지 않고 본인이 편한 대로만 처신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가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비판의식이 잘 드러난다.
(p.77-78)
나라가 고질병에 빠진 지가 이십 년이 넘었습니다. 위나 아래나 옛 관행만 따를 뿐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백성의 힘은 이미 다 바닥났고 나라에 쌓아 둔 것도 텅텅 비었습니다. 고치고 긴장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 합니다. 벼슬하는 선비라고 해도 천막 위에 집을 지은 제비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요. 한밤중에 이 생각만 하면 불현듯 일어나 앉습니다. 저 같은 하찮은 관리도 이러한데 하물며 중종, 인종, 명종의 은혜를 입고 판서 자리까지 오른 선생께서 어찌 걱정을 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이는 ‘한밤중에 불현듯 일어나 앉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 나라 걱정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희망을 걸었던 새 임금 선조가 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온갖 핑계를 대며 현실에 안주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2년도 되지 않아 이황의 처신이 옳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선조가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해, 이이는 이황의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p.83)
때때로 탈주하고 싶지만 아직 그리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벼슬에 나왔으나 배운 대로 펼칠 수 없고, 물러나자니 돌아가서 먹고살 땅이 없습니다. 그저 녹봉이나 받는 한갓진 벼슬을 원하면 붙잡고 허락하지 않습니다. 옛사람들 중에 이런 일을 만나서 잘 처신한 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알려 주십시오. 그것으로 어지러운 일에 나침반을 삼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불과 몇 년 전에 물러나는 자신을 호되게 비판했던 이이가 이런 편지를 보냈을 때, 이황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직장 후배가 퇴사하고 싶은데 경제적으로 고민은 되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는 상황에서 이황은 ‘나도 잘 처신하지 못했는데, 난들 어찌 알겠냐’는, 조금은 웃음이 나는 답신을 보낸다.
(p.83)
예전에 그런 일을 만나서 잘 처신한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 그렇지만 오늘날에 그런 일을 만나서 잘 처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일 것이오.
이이가 본 조선은 망하기 직전의 나라였다. 실제로 이이가 죽고 8년 뒤 망국의 위기가 닥쳤으니,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당시 선조에게는 그런 위기의식이 없었다. 이이가 경장, 곧 ‘고치고 긴장해야 함’을 주장할 때마다 선조는 말로만 칭찬할 뿐, 실제로 바꾸는 것이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신하를 의심하는 면도 많아서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미적거리기도 했다.
(p.91)
이이는 스스로를 ‘말을 올려도 말이 쓰이지 않는 사람’으로 칭한 적이 있어요. 이이의 벼슬살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말이 쓰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끝끝내 애쓴 과정이었어요. 젊을 적 목표로 걸었던 성인의 삶을 마지막 순간에도 놓지 않으려 했지요. 이이가 죽었던 때는 선조가 조금이나마 이이의 말을 들었던 시기였어요. 16년 동안의 정성 어린 설득이 선조의 마음을 잠깐 움직였던 순간이었지요.
이황과 이이의 결정적 차이는 이황은 완전히 정치에는 뜻을 접고 교육사업에 몰두했지만, 이이는 물러났을 때조차 정치에 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던 점이다. 이이는 선조가 자신의 말을 끝내 써주지 않으면 물러났지만, 선조의 마음이 바뀔 것 같으면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나아갈 때마다 선조의 마음을 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임금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 만한 아슬아슬한 직언도 서슴없이 했다. 이이가 좀 더 뜻이 맞는 임금을 만났다면 임진왜란을 잘 막아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p.88)
겉모습만 놓고 보면 이황과 이이의 출처는 비슷했어요. 둘 다 벼슬에 나아감과 물러남을 여러 차례 반복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출처의 지향이나 태도는 정반대였어요. 이황은 벼슬에 나아갔을 때도 물러남을 생각했어요. 이이는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도 나아감을 생각했지요.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다. 그래서 서로에게 이끌리는 점도 있었다. 성격은 이이가 좀 더 날카로웠지만, 이황은 대개 넓은 마음으로 품었다. 어쨌든 다른 시대에 살았다면 서로 알지 못했을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살며 교분을 나누었다는 점은 퍽 흥미롭다.
두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의 삶이 더 올바르고, 더 나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공부를 통해 깨친 것을 사회와 세상을 위해 바르게 쓰고자 했던 마음은 같았다. 오로지 출세를 위한 공부만 하고, 배운 것을 나쁘게 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공부를 통해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진정으로 바랐던 선비들이었다.
이 책은 그런 두 사람의 삶을 견주어보며, 오늘날 공부를 통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나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것이 정치 참여든, 교육사업이든, 올바른 지향을 추구하며 매진한다면 역사에 남을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