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며칠 후, K 교수는 연구 보고서의 결론 부분을 쓰느라고 밤 11시까지 연구실을 지켰다. 퇴근하기 위해 연구실을 나서기 직전 갑자기 미스 K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미스 K는 혼자서 음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K교 수가 “잠간 들를까요?”라고 물었다. 미스 K는 “네. 기다릴게요~ 오세요~~”라고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남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감미로운 응답이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다니 방해받지 않고 모처럼 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다. S대가 있는 봉담면은 아직 시골이라서 별을 쉽게 볼 수 있다. 밤에 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소확행(小確幸)’이라던가? 차를 운전하면 연구실에서 미녀식당까지는 10분이 채 안 걸린다. K 교수는 미스 K가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K 교수는 지난번 축제 때에 별난 선물을 하나 사 두었다. 학생들은 축제 때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서 장사를 한다. 어떤 학과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대여해 주기도 한다. 어떤 학과에서는 연못에서 탈 수 있는 보트를 빌려주고 돈을 벌기도 한다. K 교수는 축제장 한쪽 구석에서 쌀알에 이름을 새겨서 파는 곳을 발견했다. 쌀 한 알에 이름 두 글자를 새겨서 액체를 담은 작은 용기에 넣고 목걸이처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작은 쌀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 기술이라면 기술이었다. 액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쌀알을 영구 보존하는 기능을 가진 화학약품이라고 한다. K 교수는 쌀알에 ‘은경’이라는 두 글자를 새긴 목걸이를 5,000원을 주고 샀다. 목걸이 줄은 도금한 쇠줄이어서 가격이 비싸지 않았다.
K 교수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스 K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지만 “심심하던 차에 잘 오셨다”라고 반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아직까지 연구실에 계셨어요?”
“오늘은 연구 보고서 끝낼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대학 교수가 놀고먹는 것은 아닙니다. 연구 보고서 쓰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매번 연구 보고서 끝낼 때마다 진이 빠지지요. 그런데 은경씨도 오늘 바빴나 봐요? 피곤해 보이시네요.”
“그래요? 오늘 하루 종일 손님이 많아서 좀 힘들었어요.”
“돈 버는 일이 쉽지 않죠?”
“맞아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차나 한잔 마시고 가려고 들렸는데, 피곤하시다니 그냥 갈래요.”
“그냥 가시면 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요. 뭐 드실래요?”
“그럴까요?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레몬주스를 마실래요. 은경 씨도 뭘 좀 마시지요. 제가 내겠습니다."
두 사람은 손님이 없는 조용한 식당에서 마주 앉아 레몬주스를 마셨다. 시계바늘은 거의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참 동안 서로 말없이 주스만 마셨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 남녀 사이에 대화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다면, 그건 상당히 진전된 상태임을 의미한다. 조금 후 K 교수가 말을 꺼냈다.
“참, 제가 은경 씨에게 줄 작은 선물을 하나 가져왔는데요.”
“선물요?”
“예, 상당히 희귀한 선물입니다. 백화점에서는 살 수 없는 귀한 선물이죠.”
"무언데요? 궁금하네요.“
K 교수는 쌀알 목걸이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지난번 학교 축제 때에 산 건데, 쌀알을 넣어 만든 목걸이랍니다. 쌀알을 자세히 보세요. 글씨가 쓰여 있을 거에요.”
미 스K는 목걸이를 받아서 눈앞에 대고 들여다보았다. 원통처럼 생긴 작은 용기에 쌀알이 담겨 있었다. 쌀알의 한쪽 면에 ‘은경’이라고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통을 한쪽으로 기울이니 액체 속에서 쌀알이 움직인다.
“어머, 참 예쁘네요. 어쩜 이렇게 작은 글씨를 새겼죠?”
“그게 기술이지요. 맘에 들어 하시니 기쁩니다. 제가 채워 드릴게요.”
“괜찮아요. 제가 할 게요.”
미스 K는 목걸이를 받아 익숙한 솜씨로 고리 부분을 목뒤로 돌리더니 보이지 않는데도 금방 고리를 채웠다. 원통이 앞가슴의 중간 부분에 오게 줄을 골랐다.
“어때요?”
“와아, 놀랍네요. 미인은 목걸이도 잘 끼우네요. 어떻게 보지도 않고 한 번에 끼우세요?”
“그것도 기술이지요.”
“미인에게는 값싼 목걸이도 잘 어울리나 봐요. 아주 수수해 보이지만 예쁩니다. 거울을 한 번 보세요.”
“K 교수님이 예쁘다고 하면 됐지요. 뭐.”

“아무튼 작은 선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기 전 무얼 하고 계셨어요?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 피터 드러커가 쓴 경영학 책을 읽고 있었어요.”
“식당 운영하는데도 경영학 책이 필요한가요?”
“그럼은요. 국가나, 회사나, 식당이나 경영 아닌 것이 없지요. 사람을 관리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모두 경영 기술이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