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과일 주렁주렁 열리면 조선인 주려했나?










 




한 점 불빛도 없이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한
좁고 더러운 조선인 구역 지나
어두운 밤길을 인력거가 여관방을 향해 달린다
나는 무엇이 좋아
동경의 화려한 네온을 뒤로 하고 조선 땅에 와 있는가
도서관도 없고
강연회도 변변한 음악회도 없는 땅

메이지 40년(1907) 봄 3월
더럽고 누추한 경성에 온 것을 후회하는
총독부어용신문 사장 야마가타 이소오
동양척식회사 땅 3정보 공짜로 빌려
8년간 사과 농사지을 땐
한몫 잡자는 뜻이었겠지

조선인이여!
조선과수사업을 번창케한 구즈미의 공적을 잊지마라
이 달콤한 사과 향기
조선은 깊이
그리고
길이길이 기억하라 외치지만
그 과수 주렁주렁 열리면
조선인 주려했나?
               -구즈미 구니카쿠의 애플,  이윤옥 시  -



조선의 과수사업을 번창케 한 구즈미를 조선인은 꼭 기억해야 한다고 글을 쓴 야마가타 이소오(山懸五十雄)(1869~1959)는 시가현(滋賀縣)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영문과를 중퇴한 엘리트.

형 (山縣悌三郞)이 만들던 소년원(少年園) 잡지 편집에 관여하다가 나중에는 소년문고(少年文庫), 만조보(万朝報)등의 영문담당 기자를 거쳐 경성의 총독부 어용신문인 서울프레스(ソウルプレス) 사장에 취임한다.

이 시절 '경성에는 기생과 끼고 노는 요릿집 외엔 갈 곳이 없다.'고 투덜대는 글을 쓰다가 총독부의 계획 아래 진행되던 과수농업 실무책임자인 구즈미 구니카쿠를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에게 사과나무를 얻어다가 처음에는 취미삼아 심어본다. 그러다가 돈이 될 것 같으니까 총독부로부터 빌린 한강변의 3정보(9천 평) 땅에 8년간 전 재산인 당시 돈 3만 엔을 쏟아 붓는다. 처음에는 취미 생활을 위해서였겠지만 전 재산을 쏟아 부을 때는 과수농사로 한몫 보려는 심산이 깔렸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한강변에 얻은 과수원에 해마다 홍수가 덮쳤기 때문이다. 홍수만 아니었으면 그는 한몫 단단히 잡았을 것이다. 야마가타 사장은 말한다. 조선의 맛있는 사과를 만든 이는 구즈미 구니카쿠이고 그가 조선의 사과 발전에 큰일을 했으니 조선인들은 그의 공로를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식민지 아래서 행해진 일들의 진정성을 이해 못 하는 총독부 어용신문 사장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맛있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치자. 그것이 일반 조선인 입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생산되는 알토란같은 쌀이며 보리, 석탄, 아연 등의 광물과 심지어는 한국 최고의 소나무 춘양목까지 실어 나른 그들이다.

실한 사과를 제국의 수도 동경으로 실어 나르고 남았다 해도 민중들의 입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조선 안의 내지인(일본인)과 그들의 앞잡이들 입으로 들어간 뒤에 남는 찌꺼기가 민중들의 것이지만, 사과를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 초근목피를 해결할 길이 없어 부관페리로 일본 땅 아니면 허허벌판 만주로 갔다는 기록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증언도 많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구즈미 쿠니카쿠의 애플은 기억해주기 어려운 것이다.


※ 일본 한자 신명조 약자가 지원이 안돼 구자체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