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벼루에 깃들인 사연
문방 사보(하)지,연
고대 중국인이 서사(書寫)에 가장 먼저 사용한 재료는 암석. 질그릇 그리고 사람의 피부(문신)였다. 그 다음은 뼈 (거북등뼈, 소의 견갑골 등)였고, 상(商)말 ,주(周)초부터 죽간(竹簡) 목간(木簡)을 썼으며, 전국시대에는 견직물(絹織物)이 등장했다.
그러나 간(簡)은 무겁고, 견(絹)은 비싸므로 서사 활동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사회. 경제. 문화 및 교육의 발전에 따라 더욱 좋고도 값싼 서사용 자재-종이가 생겨났다. 종이는 중국이 인류에 기여한 4대 발명품(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중의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종이는 동한(東漢) 시대의 채륜(蔡倫)이 서기 105년에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1933년 신쟝(新彊) 뤄뿌버(羅布泊)에서 옛 종이가 발굴됐는데, 같이 발굴된 목간에 황룡(黃龍) 원년(기원전 49년)이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서한 때의 종이가 연이어 발굴됐으므로 중국의 종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 전에 이미 있었음이 증명됐다.
채륜이 제작한 종이는 삼, 나무껍질, 헝겊, 낡은 그물 등을 삶아 만든 것 이였다. 그러나 약 1.500년간 중국 종이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선지(宣紙)였으며 ,문방사보의 종이도 선지를 일컫는다. 선지는 출산지가 선주(宣州)이므로 그렇게 부르게 됐다. 옛날 중국의 선주는 현재 안후이(安徽)성 양자강 이남의 황산(黃山)과 지우화산(九花山)일대, 쟝수(江蘇)성의 리수이 리양. 일대까지 포함된다.
선주에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당대(唐代) 부터였으며, 후세에 점점 질이 좋아졌다. 주로 닥나무 껍질을 원재료로 쓰다가 명대(明代)에는 단향목의 껍질로 바뀌었다. 닥나무나 단향목의 껍질을 쓰면 종이가 질기고 얇으며 반질반질한데 먹이 잘 스며들지 않는 것이 흠이다. 그러다가 청대(淸代)에는 단향목 껍질을 주성분으로 하고 모래 성분의 논에서(沙田) 자란 볏짚을 다소 배합해 넣었다. 먹이 잘 스며들어 글을 쓰기에는 물론이며, 특히 그림을 그리는데 제격이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중국 문인들이 조선의 종이를 그렇게도 가지고 싶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청대 이후의 중국 문헌에 조선의 종이가 대단히 좋다는 글이 많다. 필자가 조선의 종이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한 탓으로 이 글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벼루는 안료를 갈거나 물감을 섞는 도구로부터 발전되었다. 앙소문화(仰韶文化)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벼루 두 개에 모두 붉은 색의 안료가 잔존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앙소문화는 1921년 허난(河南)성 몐츠 앙소촌에서 처음 발견된 지명을 따 이름지은 것인데, 기원전5.000년 정도의 시대로 추정되는 중국 신석기시대 문화의 하나이다. 즉 중국의 벼루도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당시 벼루는 모두 천연적인 돌을 파고 갈아서 만든 것이었다.
한 대(漢代)부터 겉에 나무나 칠기로 옷을 입히기 시작했고, 뚜껑이 있는 벼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한(東漢) 때부터는 또한 도기벼루(陶硯),구리벼루(銅硯) 위진 남북조(魏晉 南北朝) 시대에는 자기벼루(陶硯), 은벼루(銀硯), 옥벼루(玉硯)가 유행했다.
송대(宋代)에는 손잡이벼루(抄手硯)가 주를 이루었다. 이때 기와벼루(瓦硯)도 만들어졌는데, 질그릇 만드는 흙을 여과시킨 후 호두 기름에 반죽해 구운 것이었다. 원대(元代)에는 따뜻한 벼루(暖硯)가 생겼다. 먹물이 어는 현상을 막기 위해 구리로 만든 벼루의 밑에 숯불을 피울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명청(明淸) 때에는 귀한 재료(水晶 翡翠 玉石 象牙등)로 호화로운 예술품 벼루를 만들어 소장하는 풍습이 생겼다.
유명한 벼루는 대개 석재로 만든 것이며, 석재의 지질학적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벼루를 만들 수 있는 석재는 일반적으로 이암, 사암, 석회암, 탄산암 등이고, 미립자가 직경0.005- 0.01mm. 정도 경도 3-5, 상대밀도 2.9 정도여야 한다. 역대로 이름난 벼루에는 흡연(歙硯), 조연(洮硯), 등니연(澄泥硯), 홍사연(紅沙硯),단연(端硯) 등이 있다.
흡연: 원산지가 쟝시(江西)성 우웬현(婺源县)인데, 당대에는 흡주에 속했다. 룽웨이산(龍尾山) 밑의 냇물에서 파낸 돌이므로 용미연이라고도 한다 .당대 개원(開元) 연간부터 있었으므로 1.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연:원산지가 간수(甘肅)성 줘니(卓尼)현 타우허(洮河) 연안이다. 약 천년의 역사가 있다.
등니연: '澄'등은 "찌다"란 뜻이다. 즉 흙을 섬세한 견직물에 싸서 쪄 습기를 증발시킨 후 구워만든 것이다. 당대부터 있었으며 허난성 링바우(靈寶)시가 원산지다.
홍사연: 산둥(山東)성 청저우(靑州) 지역이 원산지며, 원석에 실오리 같은 붉은 색의 무늬가 있기 때문에 홍사연이라 부른다.
단연:광둥(廣東)성 짜우칭 (肇慶)시가 원산지다. 옛날 지명이 단주(端州) 이므로 단연이라 이름 지었다 1.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인갑 / 중화서국(中華書局) 사전부(辭典部) 주임, 청화 대학중문학과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