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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乙 관계 유래 밝히기

[≪표준국어대사전≫ 안의 일본말 찌꺼기(28)]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사회생활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갑을관계가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제 동기들 중에도 으쓱대기 좋아하고 목에 힘주고 발주처랍시고 협력업체 불러다놓고 알지도 못하고 소리치는 놈들 있습니다만 솔직히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협력업체에 똑똑한 분들 더 많구요. 술자리 가서 싸바싸바하며 계약서에 도장 받으려고 손비비는 그런 관계 아닙니다. 갑과 을에 대한 환상 때문에 갑도 을도 아닌 공기업을 찾으신다면 갑과 을에 대한 그 거창한 환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사회생활 자체가 갑과 을로 얽히고 얽혀있는 겁니다.” -다음-

 요즘 뜨고 있는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한 누리꾼들의 뜨거운 의견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위 누리꾼처럼 세상은 “갑과 을”이 얽혀 사는 아무것도 아닌 사회라는 의견부터 “갑”이 센놈이고 “을”은 약자라는 등 나름의 정의가 난무하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갑을(甲乙) 관계의 성립은 언제부터인가 이참에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갑을(甲乙):「1」갑과 을을 아울러 이르는 말.「2」순서나 우열을 나타낼 때, 첫째와 둘째를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일찍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갑을(甲乙)이란 예는 많이 보이지만 그러나 오늘날 흔히 쓰고 있는 계약상의 갑을의 의미는 없었다.

광해실록 12권(16909년) 1월 10일 치에 보면 “예로부터 붕당의 화가 남의 나라를 해치는 데 이르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갑을(甲乙)·피차를 막론하고 편당을 만들어 서로 알력하는 폐습을 내가 매우 미워하는 바이다. 근자에 유학증(兪學曾)이 이미 지나간 사론(死論)을 제기하여 공론을 핑계로 사욕을 이루려 하였으나 나는 조정에 화를 떠넘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그를 외직(外職)에 보임하였으니, 이는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와 같이 화제(話題)의 당사자 두 사람 (兩者)을 일컫는 예가 거의 대부분이다.

과연 조선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갑을관계의 계약"이 있었을까? 혹시 땅을 거래 함에 있어 "갑을" 관계가 있었을지는 모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연구자에게 맡기고 여기서는 글쓴이가 확인한 “요즈음 한국에서의 갑을 계약서의 원판을 빼닮은 계약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03년 12월 29일 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인 이른바 요시모리의 벌목권을 시키시조합에 위임하는 건(義盛公司伐木權을 志岐組伐木部에게 委任 件)을 다룬 계약서가 그것이다.

 

   
▲ 조선땅의 벌목 채취건을 놓고 일본인들끼리 주고 받은 갑을계약서 (주한일본공사기록 1903)

1903년의 위 계약서를 보면 요즘 한국에서 통용되는 계약서의 원판을 보는 듯하다. 특히 제5조의 “위의 목재수집 및 판매의 권리를 乙이 甲에게 일임하고 乙은 다시 이의를 할 수 없음” 이라는 부분에서는 쓴 웃음까지 나온다.

더 속이 상하는 것은 일본의 조선식민통치가 “조선을 이롭게 한 것”이라고 떠드는 일본 우익의 말과는 달리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지기도 전인 1903년 조선땅에서 일본인들끼리 울창한 조선의 삼림을 파괴하고 그 이득권인 벌목채취 건을 놓고 서로 ‘甲乙’ 계약을 맺고 있는 점이다. 이후 이러한 양식의 계약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똑 같은 패턴으로 자리 잡게 된다.

 

   
▲ 압록강변의 벌목 건에 관한 기록(주한일본공사기록 1903.12.22)

요즈음 일본 우익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아베신조 수상을 비롯한 지각없는 사람들의 “조선 침략은 없었다” 같은 망발을 미루어 볼 때 일본제국주의의 횡포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인 것 같아 걱정이다. 그러한 판국에 甲乙계약서 까지 들여다가 “어떠한 경우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조항을 천형(天刑)처럼 신주 단지 모시듯 100여년 이상을 검토 없이 쓰고 있다니 슬픈 일이다.

어제 뉴스를 보니 어느 지자체에서는 계약서에서 갑을이란 낱말을 없애겠다고 한다. 참으로 잘한 일이지만 말만 빼지 말고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계약서”에 임하는 마음이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요즈음은 한 분야에 입문하여 10년만 공부해도 “전문인”이 되는 세상이다. 일본어 공부 35년째인 글쓴이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글쓰기가 두렵고 망설여진다.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풀어내는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그거 좋다”고 하여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라는 부제의 책《사쿠라 훈민정음》을 2010년에 세상에 내어 놓았다. 이 책 반응이 좋아 후속편으로 2편이 곧 나올 예정이다. 내친김에 일반인을 위한 신문연재를 하게 되었다. ‘말글을 잃으면 영혼을 잃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애정을 갖고 이 분야에 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