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6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새소식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고

[독자얼레빗 112]

[그린경제=최성곤 기자]  3짜리 아들녀석이 머리가 아프다며 며칠째 책상에 진득하니 앉아 있질 않더니 책상 위에징비록한권이 놓여 있다. 대학에서 장차 역사전공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라 많은 책을 읽지만 요새는 학업이 바빠 일반 독서는 잘 안하는 줄 알았는데 서애 유성룡의 책을 읽은 모양이다. 어제는 아들 녀석이 두고 등교한 징비록을 오랜만에 읽어보았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가물가물했다. 

서애 유성룡은 시경(時經)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징비록집필이 임진왜란의 환란을 뒤돌아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쓴다고 했다. 한문으로 되어 있어 현대어번역판을 읽으면서도 주석 없이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었다 

   
▲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

아아 ! 임진년의 전화(戰火)는 참혹하였도다. 수십일 동안에 삼도(三道: 서울, 개성, 평양)를 지키지 못하였고 팔도가 산산이 무너져서 임금이 수도를 떠나 피란하였다. (중략) 나와 같이 보잘 것 업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중략) 이것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또한 모두 그 당시의 사적(事蹟)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 이것으로써 내가 시골에 살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유성룡은 머리말을 그렇게 써 내려갔다. 임진왜란을 몸소 겪으면서 경황이 없던 시간이 지난 뒤에 하나하나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순신, 원균, 신립, 김천일, 이빈 등 수많은 장수들의 잘잘못을 기록했는가 하면 명나라 이여송과 그 수하 병사들의 개입하여 진을 치고 싸운 이야기 등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등장인물도 많고 우리들이 잘 모르는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때론 가늘게 때론 굵직하게 펼쳐져 있다. 인상적인 것은 전쟁의 참화로 백성이 겪어야한 고통이었다.  

“420일 서울이 수복 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오고 이여송은 소공주택을 숙소로 정했다. 하루 전날 왜군은 이미 성을 버리고 나갔던 것이다. (유성룡)도 명나라 군사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성안에 남아 있던 백성을 보니 백 명에 한 명도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고 그 중에 살아남은 사람도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얼굴빛이 귀신같았다.”  

이러한 대목에서 나는 부르르 치가 떨렸다. 무능한 정권이 백성을 죽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었기 때문이다. 400여 년 전의 참혹했던 전쟁이야기를 쓴 것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한반도에는 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민족간의 전쟁이든 동족끼리의 내전이던 전쟁의 교훈을 되새겨서 참담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아들 녀석이 느낀 서애 유성룡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가한 날 저녁밥이라도 먹으며 들어 보아야 겠다.

                                     독자  최성곤 (회사원, 독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