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앞에서는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받은 정응민의 제자로 성우향 명창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가 6살이 되었을 무렵 가곡이며 평시조를 배웠는데, 판소리나 일반 민요를 배우려는 초보자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기교가 아니라, 힘찬 발성, 긴 호흡법, 다이나믹, 역동성 등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성우향은 18세가 되던 1953년부터 4년간 보성의 정응민에게서 ‘김세종제 춘향가’와 ‘강산제 심청가’ 전 바탕을 배웠고 30이 넘어 다시 보성에 들어가 ‘춘향가’와 ‘심청가’를 다시 닦았다고 했다. 그는 소리하는 태도가 곱고, 발림 구사며, 판을 휘어잡는 능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온 명창으로 성창순이 있다. 성창순은 1934년에 예향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성원목 역시 판소리의 명창이요, 고법으로 일가를 이룬 당세의 명인으로 어려서부터 임방울과 동문수학하였으며 한승호, 송순섭 등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렇듯 당대 판소리의 명창이자 명고수였던 아버지의 유전자는 성창순에게 그대로 이어져 소녀 성창순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판소리를 따라 부르게 되었고 북장단도 제법 멋지게 흉내를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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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창순 명창의 공연 모습(소정사랑회 카페 제공) |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공부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소신을 밝혔을 때, 아버지는 “기생 공부를 하려느냐?”면서 절대적으로 반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창순의 결심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여러 날 식음을 전폐해 가며 강력한 의사를 굽히지 않으며 시위를 했던 것이다. 딸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한 아버지는 비로소 허락을 했고,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15세가 되던 해, 김연수 창극단에 입단하였고, 20세 무렵까지 공기남(孔基南) 명창에게서 ‘심청가’를 배웠다고 한다. 30세가 되던 1963년, 성창순은 보성 정응민 명창을 찾아가면서, 그의 판소리 인생에 새로운 획을 긋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말년에 이른 대명창 정응민은 와병중이었다고 하는데, 성창순은 스승의 수발을 들어가며 눈물겨운 수련을 하였고, 정응민 명창에게서 김세종제 ‘춘향가’와 강산제 ‘심청가’를 완벽하게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병상의 정응민도 배우겠다는 의욕과 억척스러울 정도의 열성 있는 제자 성창순을 만나서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전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보성에서 1년 남짓 소리공부에 집착하여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대목들은 확실하게 자기화 시켰다고 한다. 판소리사를 연구하고 있는 유영대 교수는 이들의 만남을 판소리사의 운명적 만남으로 평가하고 있다.
성창순의 소리는 맑고 깨끗한 점이 특징이다. 사설치레도 알아듣기 쉽고 분명하다. 특히 방송이나 음반으로 들을 경우에도 그의 소리는 정확하게 발음이 되어 듣기가 좋다.
그가 지금처럼 유명한 소리꾼이 되기 이전의 일이다. 한번은 우연히 그의 심청가 발표회장에 청중으로 참석한 기억이 있는데, 소리의 공력도 공력이려니와 청중들을 제압해 나가는 능력이 상상 밖이어서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청중들의 반응이나 열기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성창순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초, 필자가 국악고교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였다.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에서 판소리 담당강사는 매우 영향력 있는 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평소 개인적 친분도 전혀 없는 성창순 명창을 강력하게 추천하였고 그도 흔쾌히 승낙하고 강의를 맡아 주었던 일이 있다.
또 80년대 초에는 단국대 국악과에서 강사로 성창순 명창을 초빙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모든 명창들이 그들의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야 같겠지만, 성창순은 남다른 면이 있는 것 같다. 장학생 선정에 판소리 전공자를 강력하게 추천 한다든지, 발표회에 판소리 전공 학생들을 내세우기 위해 특별 연습을 시키는 등의 열의를 보이는 것이다.
그가 최선을 다해 주었기에 학생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뿐만이 아니다. 그 후에도 YMCA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판소리 감상회나 특별감상회에 그를 초청하여 판소리의 저변을 넓히는 작업도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보다 가까운 인연이 되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소리만을 잘 하는 광대보다는 학문에 힘쓰고 이론 교육을 철저히 해서 석사명창, 박사명창이 되어 주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예술인 이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인성교육을 평소에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국립창극단의 허종렬을 비롯하여 한양대학의 조주선 교수, 국악고교의 김명자 선생, 초당대의 김병혜 교수 등 성창순의 제자들이 교육계에서 열심히 선생의 뜻을 받들고 있다. “공부할 때에는 너무도 엄격한 선생, 공부가 끝나면 한없이 인자한 어머니 같은 분”이라고 제자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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