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정석현기자]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忠淸南道 禮山郡 新陽面 新陽里) 산 33-1에 있는 조익선생 묘소에서 출토된 조익지석(趙翼誌石)이다. 1660년(현종 1년)에 제작된 이 지석은 16편의 직사각판형 청화백자(靑畵白瓷)로 되어 있다.
매편의 오른편에 ‘문효공포저조선생지묘제일(文孝公浦渚趙先生之墓第一)’처럼 표제문(表題文)과 편수(片數)가 적혀 있고, 아랫면에는 ‘공십육(共十六)’이라는 전체 편수도 새겨져 있다.
조익(1579~1655년)은 1602년(선조 2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지내던 가운데, 1611년(광해군 3년)에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다시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년)에 폐모의논(廢母議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신창현(新昌縣) 도고산(道高山) 밑에 초가를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가 즉위하자 다시 기용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김육(金育)을 도와 대동법(大同法)을 확대·실시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현재 조익의 묘소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대: 1660년(현종1년)
크기: 높이 215cm, 너비 143cm, 두께 13cm
출토지: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산 33-1번지
서체: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