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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이의 임진강 화석정

파주문화통신 (24)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임진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조가 임진왜란 때 몽진을 가던 임진나루가 보이고 그 위쪽으로 날아갈 듯 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정자가 보인다. 바로 율곡이이 선생이 늘 찾던 화석정이다.
율곡선생의 본향이 화석정 아래 율곡리였고 율곡선생은 국사 중에도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전했다

   
▲ 율곡이이가 여가가 날 때마다 찾아와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화석정. 율곡의 본향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 있다.

화석정은 본래 고려 말의 대유학자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였다고 한다. 이곳에 1443년(세종 25)에 율곡 이이(李珥)선생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짓고, 1478년(성종 9) 율곡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이숙함(李淑諫) 선생이 화석정(花石亭)이라 이름 하였다. 그 후 율곡 선생이 다시 중수하여 독서와 덕을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그 당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화석정을 찾아와 음시 청유(吟詩淸遊), 즉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고도 한다.

   
▲ 화석정에서 바라보는 임진강

율곡 선생이 중수하였던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간 그 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율곡 선생의 후손 이후지(李厚址),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지역 유림(儒林)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였으며,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에 따라 화석정을 단청하고 주위도 정화하였다.

화석정 중앙의 ‘花石亭’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으며, 정자 내부에는 율곡 선생이 8세 때 지은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진 화석정 현판 글씨

   
▲ 화석정 내부에 걸려있는 8세부시 현판

 

 

 

 

 

 

 

                           선조의 피난길을 밝혀 준 화석정 일화의 진실

화석정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 임금이 의주로 파천할 때의 일화이다.
화석정 아래에 임진강 남안에 임진나루가 있으니 고려․조선 시대 개경과 한양을 오고 가던 길목에서 북쪽의 동파나루와 연결되는 곳이다.

   
▲ <경기 지방의 명승 사적> (1937)에 수록된 '파주 화석정'의 모습※ 출처: http://blog.naver.com/pctoolsay/20049636730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지 꼭 9년 뒤의 일로 왜적의 침입으로 의주로의 피난길에 나선 선조가 임진나루에 도착한 것은 음력으로 4월 29일 그믐날 저녁 무렵인데,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고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악조건이었다.

이때 임진나루 남쪽 기슭에 있는 화석정에 불을 지르니 그 불빛이 강을 훤히 비추어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 율곡이 살아생전 이 같은 때를 대비해 제자들에게 매일같이 기름종이에 들기름을 가져오게 해 정자의 기둥에 바르게 했다고 하니 율곡 선생의 선견지명이 매우 뛰어났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당시 선조를 최측근에서 모셨던 영의정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돈의문을 지나 사현(沙峴)에 다다르니 동녘 하늘이 겨우 밝아오고 있었다. 머리를 돌려 성중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 불이 일어나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뻗쳤다. 이때 왜적은 아직 서울에 침입하지 않았을 때이니 불은 난민들의 소행일 것이다. 사현을 넘어 석교(石橋)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기 감사 권징이 달려왔다. 벽제역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커져서 일행의 옷이 모두 젖었다. 이에 임금은 할 수 없이 역에 들러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나니 이때부터 전송 나왔던 중관(衆官)이 성으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시종과 대간까지도 뒤떨어지고 오지 않는 자가 많아졌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나자 비는 점점 세차게 퍼부었다. 궁인들은 약한 말 뒤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마산역(馬山驛)을 지날 때 밭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니 이제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임진강에 이르도록 비는 멎지 않았다. 이때 임금은 배 안에서 수상 유성룡과 나졸을 불러 보셨다. 강을 건너니 이미 황혼이 지나 길을 찾기가 몹시 힘들었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승청(丞廳)이 있었다. 적이 나무를 베어다가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올까 두려워서 재목에 불을 놓았더니 불빛이 강북을 비춰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 초경이 되어서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렀다.

이 기록에 보면 이미 강을 건넌 후 승청에 불을 질렀는데 그것은 길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이 뗏목을 만들어 뒤쫓아 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마침 그 불빛이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선조 이하 조정 백관이 의주로 파천할 때 비오는 밤중에 임진나루를 건너게 되는데 이때에 화석정에 불을 놓아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회자되는 이야기는 일화일 뿐 그렇지 않다.

   
▲ 1966년 파주 지역 유림(儒林)이 성금을 모아 복원 후에 유림이 모인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pctoolsay/20049636730

율곡선생의 10만 양병설의 예견이 현실화된 임진왜란 때 아마도 율곡의 혜안을 존경하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와같은 전설이 구전되었던 듯 하다..

율곡선생이 여덟살 때 지었다는 시는 번역하여 시비에 새겨 화석정 옆 임진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세워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율곡 선생의 八歲賦詩(팔세부시)

花石亭 화석정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 율곡이 여덟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를 새겨놓은 시비(詩碑)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윤월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색홍하처거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번역>
숲풀 속 정자에는 가을이 짙고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하늘 닿은 물빛은 더욱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마냥 붉어라

산 위에는 둥근달 솟아오르고
강물은 바람결에 일렁이는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날 저문 구름 속에 울음 끊겼네


이 시는 율곡 선생이 8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화석정에 와서 지은 시이다. 그 후 100년이 지난 후에 성직이라는 학자가 아흔 살의 나이에 이 시를 써서 현판으로 만들어 화석정 벽에 걸었다. 성직은 창녕 사람으로 자는 자교요, 호는 매변이라 했는데 대학자 우계 성혼선생의 손자이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