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19살 꿈많던 처녀 남자현! 조국이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운명은 평탄했을 지 모른다. 아니 조국이 일본의 마수에 넘어갔다 하더라도 그에 빌붙어 목숨을 연명하거나 한술 더떠 그들을 이롭게 하는데 앞장섰다면 우여곡절없는 단란한 삶을 꾸려 갈 수도 있었다. 노천명이나 모윤숙 최정희 처럼 말이다. 그러나 남자현은 다른 삶을 택했다. 그것은 가시밭길이었다.
- 남자현이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 사는 의성 김씨 김영주에게 시집 가 이제 막 집안 일을 익히고 살림의 재미를 알아 갈 무렵의 어느날 이었다. 일제의 만행을 보다 못한 남편 김 씨는 부인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 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이듬해였다. 그러나 남편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결혼 6년 째로 남자현은 그때 임신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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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보면 지경리에 복원해놓은 생가 전경 - 그때부터 인생의 파란만장한 드라마 같은 남자현의 삶이 전개된다. 그는 핏덩어리 유복자 아들과 늙으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남자현이 46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들어갔다. 거기서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다부진 성격의 그는 북만주 일대의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만들어 여성계몽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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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렁한 생가 안채 - 망명 6년째인 1925년에는 채찬·이청산 등과 함께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하기로 결의했으나 실패했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 이규동, 의성단장 편강열, 양기탁·손일민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남자현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통합에 큰 공헌을 하였다.
-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안창호 외 47명이 중국경찰에 잡히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이들의 석방에 힘썼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 조사단 「릿톤」경이 하얼빈에 조사차 왔을 때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서 흰 수건에 「韓國獨立願」이란 혈서를 쓰고 자른 손가락을 싸서 조사단에게 보내어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연맹에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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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보면 지경리 생가 옆에 세운 비문 - 1933년에는 여러 동지와 함께 일본대사관 무토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계획하고 하얼빈에서 중국인 거지 할머니로 변장한 뒤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가 하얼빈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여섯 달 동안 가혹한 형벌 받아오다가 그해 8월부터 단식항쟁을 시작하였고 17일 만에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해 8월 22일 60살을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 당시 남자현의 죽음을 두고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했으며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인 <震光, 1934.1월>에는 남 여사의 항일투사 소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보다 앞선 1933년 6월 19일 자 동아일보에는 “전권대사 무토 암살 미수‘라는 제목으로 남 여사의 항일투사 소식을 크게 보도하였다. 유해는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지에 묻혔다가 1967년 7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41 묘역에 안장되었다.
- 남자현 여사의 생가는 1999년 11월 30일 영양군에서 약 1,490평의 부지에 본체와 부속 건물을 지어 그의 일생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생가는 건물만 달랑 있을뿐 대문 안에 들어가보니 썰렁하기만 하다. 뭔가 생가 건물을 좀 꾸며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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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가 입구의 안내판 - 특히 간략하나마 그의 일생이 담긴 홍보물이라도 마련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2차선 도로에서 진입하기 좋게 안내판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비게이션을 찍어도 생가 진입부분을 알 수 없어 왔다갔다 몇번을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이래저래 남자현 애국지사의 생가 툇마루 앉아 빼꼼히 열린 대문 밖 가을하늘을 바라다 보는 심정이 무척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