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1500년(연산군 6년)에 후손인 황사장(黃事長)이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금승리 산 1에 건립한 황희(黃喜)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신숙주(申叔舟)이고, 안침(安琛)이 글과 제액(題額)을 썼다.
비문에 의하면 황희(1363∼1452년)는 본관이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旽村)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1376년(우왕 2년)에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된 후, 1383년 사마시·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년)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년)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계속 증직하여, 1431년에는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여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 황희신도비(黃喜神道碑)
1452년(문종 2년) 세종 묘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원년)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황희는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서 농사개량, 인권문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러한 황희의 치적과 인품 및 가족관계 등을 알 수 있는 기본사료이다.
연대:1500년(연산군6년)
시도지정문화재 - 경기도기념물 제 34호
크기 :높이 198cm, 너비 86cm, 두께 26cm
출토지: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1번지
<출처:한국금석문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