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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금석문 톺아 보기 61]학봉 김성일신도비

[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기자]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慶尙北道 安東市 臥龍面 西枝里) 산 75-3번지에 있는 김성일의 신도비이다. 1634년(인조 12년)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몸돌과 머릿돌을 하나로 세운 것으로, 비문은 정경세(鄭經世)가 짓고, 이산뢰(李山賚)가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을 쓴 것이다. 원문은 정경세의 문집인 『우복집(愚伏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김성일(1538~1593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원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도왔으며, 특히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다가 1593년(선조 26년)에 생을 마쳤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영남학파의 중추역할을 하였다.

   
▲ 학봉 김성일신도비

김성일의 묘역에는 신도비 외에 1619년(광해군 11년)에 건립된 묘방석(墓傍石)도 있는데, 모두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성일의 생애에 대한 정보 및 그가 당시 중앙 정치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비문이다.

연대; 인조 12년 1634 
시도지정문화재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12호
높이 213cm 너비 108cm 두께 37cm
토와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 (경기도박물관)
<촐처;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