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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큐레이터 추천유물 24]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 호패

[그린경제/얼레빗 = 윤지영 기자]  조선후기 성인 남성들에게 친숙한 물건 가운데 하나가 호패(號牌)였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호패법에 따라 16세 이상의 남성들은 누구나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습니다. 또 호패에는 차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를 비롯하여 거주지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담고 있어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 다양한 호패들(목패).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성이라면 누구나 차고 다녀야 했습니다.

원래 호패법은 호구(戶口)의 파악, 유민(流民) 방지, 각종 국역(國役)의 안정적인 조달을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이 호패법은 태종 13(1413)에 처음 실시된 이래 세조 5(1459), 광해군 2(1610), 인조 4(1626), 그리고 숙종 1(1675)에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인조 대까지의 호패법은 시행 후 얼마 되지 않아 폐지되어 지속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숙종 대에 이르러야 호패법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처럼 호패법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한 것은 각종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양인들은 호패를 차는 것이 각종 국역의 부담이 가중되는 것으로 여겨 차라리 세력가의 노비로 자신을 위탁하였습니다. 그 결과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의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 각종 국역에 필요한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 시행했던 호패. (왼쪽 : 앞면)

숙종 대에 이르러 호패법이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정부의 제도 정비 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전란을 겪은 뒤, 정부는 각종 국역을 담당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의 하나로서 호패법의 시행을 추진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광해군 대와 인조 대에도 호패법의 시행을 통해 각종 국역에 필요한 인원을 확보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중 인조 4(1626)에 실시된 호패법은 호패를 차지 않는 자는 효수형(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던 처형)에 처한다는 강력한 처벌 내용을 담은 호패사목(號牌事目)을 만들어 다수의 남정(男丁)을 확보하기 위해 시행하였습니다.  

   
▲ 17세기 무신이었던 박진영의 호패
그러나 인조 5(1627)에 일어난 정묘호란으로 인해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곧바로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지속적인 인구 파악과 군적 제도의 개혁을 통해, 숙종 1(1675)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조선시대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의 시행과 함께 종이로 만든 신분증명서을 사용하는 지패법이 실시되었습니다. 지패는 그 후 상아, , 나무로 만든 호패로 바뀌는 등 몇 가지 변경이 있었지만, 호패법은 조선 후기 내내 지속적으로 유지, 운영되었습니다.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제작된 호패 

호패는 2품 이상과 삼사(三司,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원인 경우에만 관청에서 만든 것을 지급받았고, 대부분의 경우는 각자가 호패에 기재할 사항인 성명, 출생신분, 직역, 거주지 등을 단자(單子)로 만들어 관청에 제출하여 관청 단자와 대조하여 낙인 받은 뒤에 지급받았습니다.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기재내용이 다른데, 속대전(續大典)의 규정에 따르면 2품 이상은 아패(牙牌, 재질 상아), 3품 이하 잡과 입격자는 각패(角牌, 재질 뿔), 생원, 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재질 화양목), 잡직, 서인, 서리는 소목방패(小木方牌), 공천, 사천의 경우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썼습니다. 또 개인은 자신의 지위 상승에 따라 다른 재질의 호패를 찼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3실에는 문, 무과에 급제한 고위 관료의 호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17세기에 활약한 무신인 박진영(朴震英, 15691641)의 호패이고, 또 하나는 18세기에 활동한 문신인 김희(金憙, 17291800)의 호패입니다. 이 두 호패는 호패의 내용과 모양에서 차이를 보이고 호패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박진영 호패는 앞면에 박진영(朴震英) 기사생(己巳生) 갑오무과(甲午武科)’라 적혀 있고, 뒷면에 아무런 글씨가 없이 낙인만 찍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박진영이라는 사람이 기사년(선조 2, 1569)에 태어나 갑오년(선조 27, 1594, 당년 26)에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호패를 만든 때는 호패에 만든 때를 써놓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찬 사람의 살았던 때와 관직 활동을 고려하면, 광해군, 인조 대에 만들어진 호패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 18세기 문신이었던 김희의 호패(왼쪽 앞면), 조선 1784년, 11.1 x 4.0 cm, 앞서 박진영의 호패와 견주었을 때 시대와 유형에 따라 호패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희 호패는 앞면에 김희(金憙) 기유생(己酉生) 계사문과(癸巳文科)’라 적혀 있고, 뒷면에 갑진(甲辰)’이라 적혀 있고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김희라는 사람이 기유년(영조 5, 1729)에 태어나 계사년(영조 49, 1773, 당년 45)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며, 갑진년(甲辰年, 정조 8, 1784)에 이 호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호패는 외형상으로도 차이를 보입니다. 박진영 호패는 전체적으로 네모난 모양에 윗부분에 동그란 모양이 붙어 있습니다. 그에 견주어, 김희 호패는 네모난 모양에 위, 아래 부분이 동그랗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차이는 광해군, 인조 대에 만들어진 호패와 숙종 대 이후에 만들어진 호패와의 차이로 여겨집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이효종) 제공
                                                     위 내용과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허락 없이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