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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조선고서적 약탈' 실상

일본에 있는 조선 문화재 4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선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1852-1919)는 동양 3국의 고문헌 18,000여 점을 끌어모아 고향인 야마구치에 가져갔다. 그가 죽자 아들 수일(壽一)이 그 장서를 모아 1922년 고향인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를 설립하게 된다. 부자로 이어지는 문화재 약탈의 전승이다.

데라우치가 조선관련 문화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 취임 때부터이다. 그의 곁에는 책 전문가인 고도소헤이(工藤壯平,1880-1957)가 항상 곁에 있었는데 데라우치는 그를 조선총독부 내대신비서관(內大臣秘書官) 등의 자리를 주어 고서묵적(古書墨蹟)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규장각 등의 고문헌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했다. 군인 출신의 무식한 데라우치를 도와 고도소헤이는 값나가는 유구한 고서들을 데라우치 손에 넘겨주었다. 지금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에 있는 데라우치문고 (1957년에 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현립여자단기대학에 기증했다가 현재는 야마구치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소속으로 바뀌었다)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양심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동경의 고려박물관에서 펴낸 《유실된 조선 문화 유산 -식민지 하에서의 문화재 약탈, 유출, 반환·공개》 책 21쪽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의 규장각 조사는 수집과 병행되었는데 조사와 수집은 한마디로 일체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사만이 목적이라면 단 1권도 유출이 되어서는 안 되는 고서들을 트럭으로 일본에 실어가 하나의 거대한 문고를 이루고 있으니 누가 보아도 조사=약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 공주송산리 고분 6호 발굴현장/ 6호 고분 발굴자 가루베/ 가루베가 가져간 백제 연화무늬기와/ 조선총독 데라우치/ 야마구치현립대학 데라우치문고(시계방향)

약탈된 문화재 가운데 두어 개를 들면 그 첫째가 ‘정축입학도첩(丁丑入學圖帖)’이다. 이는 순조(純祖)임금의 장남인 효명세자(1809-1830)가 9살되던 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취학(就學)할 때의 의식(儀式)을 기록한 도첩(圖帖)이다. 또한 추사 김정희의 ‘완당법첩조납인변서(阮堂法帖曺納人辯書)’ 는 서법(書法)을 손수 기록한 책으로 높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는 자료이다.

다행히 이 두 가지를 포함한 일부 문화재가 1996년 경남대학 개교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반환되었다. 경남대학과 야마구치대학이 자매결연을 맺어 꾸준한 문화재반환 노력을 경주하여 얻은 결실이다. 이들 문화재는 1997년 1월 24일 98종 135점을 반환받게 되었는데 경남대학은 특별전시회를 연바있다.

데라우치가 고서를 마구잡이로 가져가 문고를 만든 이야기는 그래도 한국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가루베지온(輕部慈恩,1897-1970)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유적조사를 위해 27살의 나이로 평양에 건너와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고고학자인 그는 그때까지 ‘공주에 백제 고분은 없다’고 주장했는데 평양에 온지 2년 후에 ‘공주 송산리 구릉지대에서 백제 왕릉 4기를 발견한 이래 738기의 고분 발견’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백제 고분의 전문가로 행세한다. 이후 일본<고고학회지>에 1933년부터 1936년 까지 8회에 걸쳐‘ 공주백제고분’을 발표함과 동시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백제토기류 등을 동경제국대학문학부 고고학 교실 등에 선심 쓰듯 나눠주고 있다.

학자라면 연구와 조사로 끝마칠 일이지 어찌하여 백제토기와 기와류 등을 본국에 맘대로 보냈단 말인가! 고고학자의 양심이 의심스럽다. 가루베가 발굴한 6호분은 1971년 세상을 놀라게 한 송산리 7호분인 무령왕릉 고분 이전 것으로는 최고로 치는 고분으로 1933년 7월 29일부터 시작되어 8월 2일까지 발굴했다고 총독부에 보고했는데 8월 상순에 후지타(藤田亮策) 등 3명의 학자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흔적 없이 깨끗이 청소 되어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일본시민단체는 고고학자 가루베가 ‘공주의 중차대한 6호 고분 속의 유물을 꺼낸 뒤 무덤 바닥을 깨끗이 치우고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당했다 (持ち出し墓床をきれいに掃き出した後にすでに盜掘された)고 한 것 같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해방 후 오구라(小倉武之助)가 트럭을 몰고 부여박물관에 가서 백제유물을 구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가루베의 소장품을 사갔다는 증언 《유실된 조선 문화 유산 -식민지 하에서의 문화재 약탈, 유출, 반환·공개》이 23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고학자 가루베가  공주 송산리 6호 고분 부장품의 출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가루베가 강경여자중학교에서 마지막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해방이 되자 자신이 소장한 책과 문화재를 트럭으로 싣고 부산 쪽으로 갔다는 것으로 보아 선편으로 일본에 빼돌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패전에 따라 정부는 일본정부에 반환요구서를 보냈으나 묵살되었고 유족은 2006년 11월에 겨우 4점의 유물만을 공주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으로 송산리 6호 고분 유적 도굴 사건은 끝을 맺었다. 이러한 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파헤쳐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양심 있는 일본시민단체가 있어 그나마 힘이 된다.

지난 일제강점기에 고분을 포함한 수많은 조선의 문화재가 이 땅에서 어이없게 사라졌고 그 한가운데에 일본 제국주의가 버티고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들을 정확히 밝히는 작업과 함께 그것들이 제자리로 되돌아와야 하는 일에 앞으로 역사의식이 투철한 한일양국의 양심 있는 사람들의 큰 관심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