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이윤옥 기자]
달구벌 만세운동을 이끈 " 임봉선"
이윤옥
조선을 달군 만세운동
달구벌로 치달으매
신명의 처녀 선생
태극기 높이 들고
빗발치는 포탄 속을
두려움 없이 뛰어들어
서문통 떠나가라 외쳐댈 때
밀물처럼 제자들 뒤따랐네
시위 때 당한 고문
끝내 도져
스물여섯 꽃다운 청춘
꽃상여 타고 떠나던 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초목마저 울었어라.
▲ 앞열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임봉선 애국지사
임봉선 애국지사(1897-1923)
26살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한 임봉선 애국지사! 그가그렇게 젊디젊은 나이로 죽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임봉선 애국지사는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3·8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년의 모진 옥고를 치루고 나와 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대구신명고등학교 자료에 따르면 임봉선 애국지사는 1918년 4월 1일자로 교사에 임용되어 대구의 만세운동이 있던 3월 8일 사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초임 교사 나이 22살 이었고 교사 생활 채 1년도 안된 때였다. 그는 1919년 3월 8일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이 때문에 4월 18일 대구지방법
원에서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1923년 26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만일 그가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교사로서 한평생을 무난하게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임봉선 애국지사는 경상북도 칠곡 사람으로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곳은 2월 24일 경상도 독립만세운동의 연락 책
임자였던 이갑성이 대구에 내려와,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이상백·백남채 등과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
을 통하여 2백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신명여학교 교사였던 임봉선 애국지사는 자신을 찾아온 김무생·박제원으로부터 서울과 평양에서 전개된 여성들의 독립만세운동 활약상을 전해 듣고 이에 적극 참여하기
로 결심하였다.거사날인 3월 8일 오후 3시 무렵, 임봉선 애국지사는 50여명의 신명여학교 제자들을 이끌고 시장에 나아가,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임봉선 애국지사가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앞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를 돌아 달성군청 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대기 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행진이 잠시 멈추자 일본군·헌병·경찰은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 군중을 제압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현장에서 많은 시위군중이 체포 되었는
데, 임봉선 애국지사도 이때 잡혀갔다. 1년의 옥고 끝에 나와 얼마 안 되어 26살의 꽃다운 청춘에 죽음에 이른 것은 혹독한 고문 후유증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봉선 애국지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4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