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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서운 호랑이' 월남 이상재 선생 서거 87주기를 맞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저 서구열강을 보라. 학술의 발달이 저 같으며 도덕의 진보가 저 같으되 그 나라가 기운차게 일어나 날로 강성해가니 이는 그 문화가 동양 고대처럼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專制下)에 굴복하게 하던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인 까닭이니 한국의 뜻있는 군자여! 자국 고유의 장점을 보존하며, 외래 문명의 정화(精華)를 채취해서 신국민을 양성할만한 문화를 진흥할 지어다.”

   
 
 

이는 이상재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9일치에 쓴 ‘문화와 무력’이란 제목의 논설 일부다. 선생은 여기서 국수주의나 사대주의가 아닌 우리 고유문화의 장점 위에 다른 문명의 우수한 것을 더하여 국민을 이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문하는 것이다.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YMCA 대강당에서는 '월남 이상재 선생 제87주기 추모회'가 열렸다. 이날 추모회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현손인 이상구 중국위해시립대학 교수, 이기열 서울YMCA 부이사장, 안창원 서울YMCA 회장, 이상복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 대표회장 등이 참석했다.


 몇 해 전 그때도 이런 봄날로 기억된다.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있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 복원을 위한 기념식에 참석 했었던 적이 있다. 한적한 여느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이곳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은 태어나 국난의 시기에 꼿꼿한 민족지도자로 우뚝서 오늘날도 그의 정신과 자취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월남 이상재 선생(1850~ 1927. 3. 29)은 일제강점기 때 종교운동과 청년운동에 앞장섰으며 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 등에 관여하였다. 또 조선교육협회 회장ㆍ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웃) 총재ㆍ신간회 회장 등을 맡으면서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 실천을 몸소 실행하였다.


 선생은 어려서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濬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1884년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이었던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게된다.


   
▲ 충남 서천 한산의 생가 (문화재청 제공)
     
 

   

▲ 생가 전경 (문화재청 제공)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 선생은 청국공사와 담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열렸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  월남 선생의 사회장에 몰려든 시민들( 1927년 4월 7일)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하여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구금·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이 단체가 훗날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었으며 선생의 3·1운동 때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은 유명하다.


또한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본의 거물 정치인 오자키가 찾아왔을 때,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편 뒤 '우리 응접실'에 앉을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 가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 백 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다.”라고 적었다고 할 만큼 투철한 민족정신을 지녔다. 오늘은 월남 이상재 선생이 돌아가신 87년 되는 날이다.


 일심상조 불언중(一心相照 不言中)
마음이 서로 통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밝게 통한다. 


는 말은 월남 선생이 들려준 말이다. 선생의 유저(遺著)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진평화(眞平和)』·『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청년회문답』과 『상정부서(上政府書)』 제1·2,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