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江原道 江陵市 大田洞)에 자리한 최치운묘소에 있는 최치운묘비(崔致雲墓碑)이다.
1442년(세종 24년)에 세워진 이 비의 비문(碑文)은 남수문(南秀文)과 유의손(柳義孫)이 각각 서문(序文)과 명문(銘文)을 지은 것이며, 비의 글씨도 최흥효(崔興孝)와 정척(鄭陟)이 각각 글씨와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 최치운(1390~1440년)은 1417년(태종 1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봉상시주부(奉常寺注簿),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공조참의(工曹參議)와 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냈다. 1439년(세종 21년)에는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계품사(啓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범찰(凡察)·동창(童倉) 등의 야인들이 양민으로 경성(鏡城)지역에 영주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이를 관철시켰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사신이 되어 명나라를 왕래하며 외교적인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편, 『무원록(無寃錄)』을 주석(註釋)하고 율문(律文)을 강해(講解)하는 등 학문정비에도 기여하였는데, 평소 술을 지나치게 즐겼으므로 세종이 「계주서(戒酒書)」를 내려 절제할 것을 명하니, 그 글을 벽에 걸어두고 출입할 때에는 꼭 이것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1645년(인조 23년)에 강릉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비문에는 그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최치운묘비(崔致雲墓碑)
*연대: 1442년 (세종 24년)
*소재지: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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