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제암리 비극을 온 몸으로 껴안은 ‘김씨부인’
이윤옥
해마다 삼월이면
제암리 만세 함성 속에
아련히 들려오는
김씨부인의 애절한 목소리
제국주의 방아쇠
교회 안에 당겨지던 날
어린 핏덩이 끌어안고
피 토하며 숨져간 여인이여
조선의 동포들 불같이 일어나
민족의 이름으로
일제를 꾸짖었노라
제암리 김씨부인 독립의 외로운 길
함께하자고
이천만 동포들
뜨거운 가슴으로 손을 잡았노라
▲ 총탄에 맞고 불타 죽은 이나 살아 남은 자나 고통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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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당시 각 지방에서 일어났던 만세시위 속보 |
김씨부인 (1899 ~ 1919. 4.15)
이름도 없는 강태성 애국지사의 아내인 김씨부인은 경기도 화성 사람으로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씨부인은 이날 남편 강태성과 함께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발안 장터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돌을 던지며 대항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일본인 거주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수원에서 대규모의 일본 경찰과 헌병이 파견되어 보복을 위해 검거작업을 벌였고, 그 뒤에도 제암리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그러던 차에 4월 15일 오후 2시 쯤 아리타 토시오(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30명을 제암리 기독교 교회당에 모이게 했다. 일본중위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여 그 자리에서 23명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학살이 일어났고 교회 밖에서 6명이 살해당했다.
▲ 새로 지은 제암리 교회
일본군은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냈으며 일부 양심 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에서는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김씨와 남편 강태성 애국지사는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씨의 나이 21살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 향남면 발안 장날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그의 남편 강태성 (姜太成, 모름 ~ 1919. 4.15)도 현장에서 순국하여 정부에서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4권 에 나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