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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협률사(1902년)는 최초의 극장식 공연장

[국악속풀이 156]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공연 예술인들의 우수한 창작국악극을 발굴하기 위해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는  제1회 창작국악극 대상을 가진바 있고, 이와 관련한 세미나에서 필자는 창작국악극이라는 의미가“새로 지은 국악을 기반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연극”이라는 명칭임에도 아직은 생소하고 어색한 용어라고 했다. 기존의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제작된  <창극>과는 무엇이 다른가?

이 명칭이 기존의 <경서도 소리극>, <정가극>, <재담극>, 기타 동요나 국악풍의 극을 두루 포괄하는 이름인가? 출품된 공연들의 이름은 뮤지컬이나 국악뮤지컬이 많았고,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이름도, 판소리 음악극이라는 이름도, 판소리극이라는 이름도 있는가 하면, 음악극, 악극, 소리극, 창극, 창작창극, 정가극, 마당극, 연희극, 연극, 총체극, 인형극, 가무극, 국극, 국악극, 등 20여 종으로 매우 다양하였다.

서양음악에서는 대본을 바탕으로 한 가창중심의 음악극을 오페라(opera)라고 부르는데 연극적 대사가 들어가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연극적 대사가 많이 삽입되어 있는 오페렛타나 뮤지컬과는 구별해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개념인 것이다. 초창기에는 오페라도 dramma in music, 즉“음악속의 연극, 줄여서 음악극”으로 불렀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음악극, 즉 창극이 시작된 시기는 1900년대 전후로 보고 있다.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를 참고해 보면, 광무(光武) 초부터 서울 동대문 안에 협률사(協律社)가 자리를 잡고 일반 흥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후 그 자리에 광무대(光武臺)가 세워지면서 이를 속칭 <광무대협률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최초의 서양식 원형극장 협률사(協律社)

여기에는 강용환, 염덕준, 유공렬 등의 판소리 명창이 주동이 되었고, 박춘재, 문영수, 이정화 등, 경서도 명창들의 소리와 줄타기 및 기생의 가무, 음률 등이 중심 연예물이었다. 또한 당시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던 김창환이나 송만갑과 같은 국창들을 비롯하여 허금파, 강소향 등 여류 명창들이 협률사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그때까지 혼자서 부르던 판소리 <춘향가>는 극 중의 대화창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것이 1900년 초의 원각사(圓覺寺)시절에 비로소 창극화(唱劇化)되어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는 것이다.

1900년 초에 판소리와 같은 1인 창극조 소리가 여러 명의 배역으로 분창되면서 창극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창극의 역사는 약 100여년 남짓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극의 4대 요소를 무대, 극본, 배우, 관객으로 꼽고 있다. 무대는 바로 극장을 의미한다. 이 당시의 협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창극단체 육성의 시초라 할 수 있는데, 그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속편(朝鮮常識問答續篇)》에 나와 있는 희대설(戱臺說)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희대라 함은 극장이다. 조선의 옛 연희에는 무대를 요하지 않는 동시에 특정한 극장의 시설도 없다. 1902년 가을, 고종의 어극(御極) 40년의 칭경식(稱慶式)을 거행하기 위한 장소(지금의 서울종로구 신문로에 자리잡은 새문안 교회 터)로 신식 설비를 갖춘 무대를 건설하였는데, 규모는 작으나 영국 런던의 로열 극장, 오스트리아 비인의 왕립극장과 견줄만한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극장이었고 그 구조나 규모는  계단식 관람석을 갖추어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 경축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김창환, 송만갑 등은 전국의 남녀 명창을 집합시켜 창극 <춘향가>를 연구하여 가무 연희를 연습시켰다고 한다.

그 당시 중심인물로는 김창환을 주석으로 송만갑, 이동백, 허 금파, 강소향 등의 판소리 명창과 박춘재, 문영수, 이정화, 홍도, 보패, 등의 경서도 남녀 명창 170여명의 구성이었다. 그러나 1902년 가을로 예정되었던 칭경식은 콜레라의 유행, 영친왕(英親王)의 천연두, 농황(農況)사정,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등으로 인해 1903년 가을 예식의 형식만 갖추었다고 한다.  

1902년, 협률사라는 최초의 극장식 공연장을 세우면서부터 전통물의 무대공연이 시작되었고 전용 연예장으로 쓰이다가 1908년에 본격 극장으로 재출발하면서 명칭이 원각사로 바뀌었다. 그 뒤로는 동대문 곁에 광무대가 있었고, 사동에 연흥사(演興社), 낙원동에 장안사(長安社), 종로에 단성사(團成社)등 본격적인 대중 공연장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원각사 시대(1908~1910)에는 판소리를 필두로 해서 탈춤이나 꼭두각시놀음 등 우리 전통극과 고유 민속예능이 중심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새로운 형태가 있었다면 판소리를 변형시킨 창극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사설극장들은 낮에는 뚝섬의 놀량패(선소리)나 농악패들을 불러 볼거리를 제공하였고, 밤에는 영화를 상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4년에는 광무대로 합치게 되고, 구파극의 중심으로 활동하던 박춘재 등의 인기도 광무대가 문을 닫게 된 1931년 이전과 그 이후는 현저히 달라졌으며 다른 일반 극장들이 새로 생겨나면서 국악 무대는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