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최미현 기자] 해치란 조선에서는 해태라 부르는 전설상의 동물로 사슴, 양, 염소, 사자 등의 모습과 비슷하다. 해치는 재판을 관장 하며 거짓이나 죄를 판단하는 전설 상의 동물로 전해오고 있다. 이 작품은 긴장감이 없고 귀여운 느낌을 주는 연적이다. 청화 안료 밑에 양각기법으로 얼룩무늬가 표현되었다.
▲ 해태모양 연적 19세기 작품(교토 고려미술관 제공)
*교토 고려미술관은 어떤 곳인가? <김영조 작가의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1837회 기사를 소개한다>
1837. 한국엔 간송미술관, 일본엔 정조문의 고려미술관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강점기에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나라 밖으로 새 나가는 문화재 수집에 평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1938년 서울 성북동에 한국 최초의 사설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뒤 평생 문화재 수집에 혼신을 다 쏟았으며 이 중에는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10여점이 국보로 지정 되었고 1000여 점의 귀중한 유물이 있습니다. 1966년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한 이래 이곳은 한국의 미술사(美術史) 연구의 산실(産室)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에 버금가는 분이 일본 교토에 있습니다. 바로 정조문 선생이 그분인데 선생은 1949년 골동품상이 밀집해 있는 교토 산조(三條) 남쪽 거리를 걸어가다가 어느 가게 진열장에 놓인 둥그런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보고는 푹 빠져서 당시 돈으로도 엄청난 금액이었던 이 달항아리를 사려고 1년 동안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선생이 만난 달항아리는 그냥 항아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뿌리, 곧 조선의 위대한 정신의 소산임을 깨닫고 이후 평생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문화재 수집에 쏟아 부었지요.
물샐틈없이 서울의 전형필 선생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선의 문화재는 그 유출의 끝 간 데를 모를 만큼 일본 땅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이때 정조문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조선의 귀중한 1,700여 점에 달하는 문화재의 행방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애지중지 모은 유물들은 자신의 집을 기증하여 1988년 10월 25일 교토 기타구 시치쿠가미노키시초에 “고려미술관”을 세웠습니다.
조용한 주택가에 세워져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곳은 문인석이 양옆에 턱 버티고 있는 정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에 석탑 등이 전시돼 있고 1층엔 도자기 등 미술공예품, 2층엔 생활미술품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교토를 찾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꼭 이 미술관에 들러 정조문 선생의 나라사랑을 되새겨보면 좋을 일입니다.
*찾아가는 길 : JR교토역에서 시버스 9번 버스를 타고 '가모가와추각코마에’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안내간판이 보인다. 약 40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