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친애하는 한국 혁명여성 여러분! 지난 30년간 이민족의 착취와 압박, 망국의 비통함이 우리에게 안겨준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망국의 고통이 어찌 남자들만의 몫이겠습니까! 우리 한국여성이 겪은 고통과 아픔이 더욱 심했다는 데 이견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구국의 책임이 어찌 남자들만의 몫이겠습니까! 우리 여성의 책임이 더 크고 중하다는 말에 이견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절대 우리 여성의 역량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전 세계 20억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입니다. 우리 3천만 한국민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 아닙니까? 남녀의 역량을 합하여 각기 맡은바 직분과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세계, 진선진미의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방순희 선생이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한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1940. 6. 16) 선언서 중에서>
▲ 방순희 애국지사 (5월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에서 뽑힘)
방순희 애국지사는 국운이 기울어 가던 190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일찍이 경성으로 상경하여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입학하였다. 정신여학교는 당시에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주권의식과 애국사상을 가르쳤는데 북장로교에서 운영하던 학교로 교사와 학생 모두 열렬한 애국투사들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면서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애국부인회를 조직했으며 대한적십자 경성지부를 조직하여 왜경의 감시를 받을 만큼 활약이 두드러졌다.
열여섯 살 되던 1919년 3·1독립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의 삼엄한 감시 탓에 상해로 망명했는데 때마침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서 이를 뒷받침할 여성 단체가 필요하였다. 재정형편이 열악한 임시정부를 돕는 일은 남녀를 불문하는 일이었지만 특히 여성들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을 조직하여 회비 징수와 군자금 모집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이들은 독립전쟁요원들을 지원하고 국민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방 애국지사는 당시 보성중학 졸업반일 때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왜경에 고문을 당하다 1921년 상해로 망명한 우당 김관오 애국지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김관오 애국지사 역시 투철한 독립투사 동지로서 함께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눠 독립의지를 불태운 방 애국지사의 주요공적을 보면 1938년 8월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 1942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경구당부 간사, 1942년 10월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부회장, 1943년 6월에는 한국임시정부 선전부장, 194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 연락원으로 뽑혀 선발대로 귀국하게 될 때까지 굵직굵직한 일들을 도맡아 조국광복의 초석 역할을 톡톡히 한 여장부의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올 5월은 방순의 애국지사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아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