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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펄 시스터즈 “커피 한 잔”

[디제이 김상아의 음악편지 4]

[그린경제/얼레빗=김상아 음악칼럼리스트]  한때는 전통 차의 반격으로 주춤하던 커피의 인기가, 요즈음 시가지를 걷다보면 두 집 건너 커피점문점이 들어설 정도로 재 반격에 성공한 느낌이다. 아니 이젠 커피가 도심을 점령한 꼴이다.  

6세기경부터 이슬람수도승들의 음료로 애용되던 커피가 이젠 전 세계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호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커피가 언제부터 우리의 입맛을 그렇게 사로잡았을까? 

사실 우리나라에서의 커피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1895아관파천당시 아라사공사관에 피신한 고종황제가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커피 맛을 보았다한다. 그 후 고종은 경운궁에다 아예 정관헌(靜觀軒)이란 다과공간을 짓고 그 곳에서 커피를 즐기며 음악 감상을 하였다. 그 즈음 생겨나기 시작한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도 당연히 커피를 판매 하였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이거나 고관대작을 대상으로 한 것 일뿐 아직 일반대중들은 언감생심이었다. 

커피가 대중의 품으로 들어온 건 1920년대 들어서이다. “후다미라는 곳을 효시로 다방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당시 문화예술인들은 다방을 하나쯤 여는 걸 커다란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다. 물론 그 시절에도 유성기를 갖추고 서양고전음악이나 재즈곡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은 필수였다. 

하지만 아직은 전 국민의 여가공간은 아니었다. 해방과 동란의 시공을 지나 60년대 들어서 다방은 지방 소도시까지 퍼져나가며 대중화에 성공한다. 그러다가 70년대 들어 음악다방의 등장으로 최전성기를 맞는다. 이른바 7080세대들에게는 다방은 곧 음악다방이라는 등식이 확립되어있다. 그 세대들은 그 공간에서 디제이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꿈과 사랑과 희망을 키워갔었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레지의 눈총을 받아가며 하루 종일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린 경험도 있을 것이다. 폭설이 내리는 창가에서 따뜻한 커피 잔을 감싸 쥐며 그 시절을 추억해본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팔분이 지나고 구분이 오네
일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내 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아 그대여 왜 안 오시나
아 내 사랑아 오 기다려요
불덩이 같은 이 가슴
엽차 한잔을 시켜 봐도
보고 싶은 그대 얼굴
내 속을 태우는구려
 

커피 한잔이 출시되던 1969년은 우리 가요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한 해였다. 우선 신중현사단이 주도한 소울, 싸이키델릭싸운드의 약진이 그 하나요, 그다음으로 여성 소울싱어의 대거 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중현 휘하에서 이정화, 김추자, 펄 시스터즈가 맹활약을 펼쳤다. 심지어 김상희 마저 소울싱어로 전향을 할 정도로 소울의 인기가 하늘에 닿았다. 

정민섭과 손잡은 양미란, 김희갑과 콤비를 이룬 임희숙등이 모두 그해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여성소울싱어들이다. 특히 펄 시스터즈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져 “69 MBC 가수왕에 등극하며 절정의 인기를 과시하였다. 신중현은 자신의 곡이 히트를 하지 못하면 다른 가수를 통해 재 취입시키기를 즐겼는데 커피 한 잔역시 1964년에 에드 포에 의해 발표되었던 곡이었다. 

   
 

윤복희가 이 땅에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켰다면 펄 시스터즈는 핫 팬티 열풍을 몰고 왔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핫 팬티에 롱부츠를 신은 패션은 가위 뇌쇄적이었다. 미모와 가창력을 겸비한 펄 시스터즈의 등장에 팬들은 환호했고 펄 자매는 데뷔 첫해에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그 여세로 준과 숙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진출하였으나 준 히트 정도에 그쳤고, 미국에도 진출하였으나 마음처럼 녹록치 않았다. 

언니인 배인순은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으며 화제를 뿌렸으나 해로를 다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동생 배인숙은 79년에 솔로가수로 다시 돌아왔으나 곧 재미동포 의사와 결혼하며 자연인으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 가요계에 비디오 시대를 활짝 열었던 펄 시스터즈!
그 시대를 살았던 팬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진주로 박혀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