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1712년(숙종 38년)에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에 건립된 김석주(金錫冑)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송상기(宋相琦)이고 서자는 조정서(趙正緖)이며 제액(題額)은 김진규(金鎭圭)가 전서(篆書)로 썼다.
비문에 의하면 김석주(1634∼1684년)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으로 아버지는 병조판서 좌명(佐明)이며, 어머니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部都摠管) 신익성(申翊聖)의 딸이다.
1657년(효종 8년)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증광 문과에 장원, 전적(典籍)이 된 뒤 1674년에는 겸보덕(兼輔德)에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다. 당시 서인 중의 한당(漢黨)에 가담해 집권당이던 산당(山黨)에게 중용(重用)되지 못하였으나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許積) 등과 결탁해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守御使)에 이어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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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주 신도비 |
1680년 허적 등이 유악남용사건(油幄濫用事件)으로 실각한 뒤 이조판서가 되어, 남인의 잔여 세력을 박멸하고자 허견(許堅)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여 이들을 추방하였다. 1682년 우의정이 되어 김익훈(金益勳)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전익대(全翊戴)를 사주해, 허새(許璽)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1683년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했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반감을 사서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는 원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사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뒤에 복구되었고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식암집』·『해동사부(海東辭賦)』가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숙종대 붕당정치가 변질된 시기에 주로 활동하던 김석주의 행적 및 가계, 성품 등은 물론 제2차 예송논쟁에서부터 경신대출척기 서인의 노·소론 분열에 이르기까지 붕당정국의 동향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