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거친 밭 쓸쓸한 언덕에 寂寞荒田側
흐드러진 한 송이 꽃 가지를 눌렀네 繁花壓柔枝
매화비 그쳐 향기 날리고 香經梅雨歇
보리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影帶麥風欹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주리 車馬誰見賞
벌 나비만 부질없이 찾아드네 蜂蝶徒相窺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自慙生地賤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堪恨人棄遺
위는 신라 후기 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촉규화(蜀葵花, 접시꽃)”란 한시(漢詩)입니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살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살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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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가운데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그러나 <토황소격(討黃巢檄)>이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학문도 뛰어난 최치원은 별로 대접받지 못하지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매화비 곧 장마가 그쳐 향기 날리지만 보리바람에 그림자가 흔들릴 뿐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학문적 경지에 자부심을 가진 최치원이지만 수레 탄 고관대작은 보아주지 않고 부질없이 벌 나비만 찾아들고 있는 게지요.
그렇게 참고 견디다 최치원은 고국 신라로 귀국합니다. 귀국한 최치원은 혼란한 신라를 보고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나라를 개혁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신라는 최치원의 “시무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특히"골품제도(骨品制度)"로 유지되는 신라사회에서 6두품에 불과한 그가 할 일은 더욱 없었습니다. 결국 뛰어난 인물 최치원은 말년을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해인사에 머물렀는데 그 뒤의 흔적이 없이 신선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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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 영정(왼쪽), 국보 제315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