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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궁이 명성황후를 왕비로 책봉하겠다는 교서를 읽는다. 황후는 북쪽에 4배하고 앉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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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의 어가행렬이 운현궁으로 들어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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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이 가마를 타고 운현궁으로 들어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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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사 중간 중간에는 궁중무용 곧 정재(呈才)를 선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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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백명의 관객이 운현궁 마당을 꽉 메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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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례를 마친 명성황후(왼쪽)와 고종이 나란히 좌정하고 있다.(운현궁 제공) |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어제 9월 20일 오후 2시에 서울 운현궁에서는 “고종명성후가례” 행사가 있었다. 원래 “가례(嘉禮)“는 조선시대 나라에서 시행하기로 규정한 다섯 가지 의례(五禮) 곧 길례(吉禮, 상례와 장례에 들어있지 않은 모든 제사), 흉례(凶禮, 상중에 하는 의례), 군례(軍禮, 군사에 관한 예의), 빈례(賓禮, 손님을 접대하는 예), 가례(嘉禮) 가운데 하나로 가례는 크게 혼례(婚禮)와 관례(冠禮, 어른이 되는 예식)가 있다.
운현궁에서 재현한 “고종명성후가례”는 1866년 3월 치러진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1852년생 명복(李命福, 고종의 아명으로 고종이란 이름은 죽은 다음 얻은 묘호)과, 1851년생 여흥(驪興) 민(閔)씨 치록(致祿)의 딸 자영(玆暎)과의 혼례식 장면이다. (역시 ‘명성황후’란 이름도 죽은 뒤 올려진 시호)
행사장에는 1시간 전부터 수백 명이 몰려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보였다. 중간 중간 궁중무용 곧 정재(呈才)를 선보여 왕실 행사의 위엄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깊어 가는 가을 날씨지만 아직 운현궁 뜰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관객들을 숨죽여 장엄한 의식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번 고종과 명성황후 혼례식에 참석한 정미자 씨( 63살, 효자동 거주)는 손녀와 함께 와서 매우 뜻깊은 행사를 보았다면서 " 비운의 왕비인 명성황후의 가례 재현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아무리 포악하다 해도 한 나라의 왕비를 시해하는 그런 만행은 지구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일제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크게 사죄해야 할 것"이라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황후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운명했지만 고종황제와의 가례식 때 만큼은 여느 신부 만큼 설레였을 것 같다. 참으로 아름답고 장엄한 혼례식 재현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