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 때 국어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가’ 자에 ‘기윽’하면 ‘각’하고, ‘가’자에 ‘니은’하면 ‘간’ 하는 식으로 천자문을 외우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는 1925년 윤동주가 만 8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야기를 동창생이자 외사촌동생인 김정우 씨(시인)가 들려주는 말입니다. 중국 용정의 명동소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만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의 생애 28년 동안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기 때문이지요.
▲ 1931년 3월 20일 명동소학교 졸업식
명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인데 동창생 김정우 씨가 “병풍처럼 산이 에워싼 이 마을은 서북쪽에 3형제 바위가 서 있어서 서북풍을 막아준다. 봄이 오면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할미꽃, 방울꽃 들이 앞 다투어 피고 앞 개울가 버들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무릉도원이었다. 가을 단풍은 황금이요, 은색 찬란한 설야는 그야말로 장관이다.”고 할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특히 폭설이 내리는 날에는 노루 떼, 멧돼지 떼들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곤 했다고 합니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그는 본래 재주가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지요. 그러나 어쩌다 문답을 할 때 막히면 눈물이 핑 돌곤 했지요.” 이는 윤동주의 소학교 4학년 담임이었던 한명준 목사의 회상입니다. 어린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소년이었는데 그때 벌써 서울의 《어린이》와 《아이생활》이라는 잡지를 구독하여 읽었으며 5학년 때는 고종사촌이자 동창인 송몽규와 함께 《새 명동》라는 월간잡지를 등사해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윤동주는 친구들과 어울려 생의 절반을 용정의 명동에서 보냈고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지요. 그 뒤 윤동주는 거기서 10리길이나 되는 은진 중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 현재 용정의 명동학교 터
은진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문학 활동을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윤동주가 다닌 은진중학에서는 당시 일본어 교과서로 배웠는데 민족의식이 투철한 선생님들은 일본어 교재를 즉석에서 한국말로 읽어 주는 수업을 했지요. 이것은 어린 윤동주에게 민족 언어에 대한 깊은 의식을 심어주게 된 계기였습니다. 이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1942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채 유학의 꿈을 펴지도 못한 채 사상범으로 잡혀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