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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기업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32>현대그룹을 일군 섬세하고 정직한 인간성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12‧12와 광주민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언론과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들었다. 주요기업 그룹 계열사 166개를 1984년까지 강제 정리하는 시책을 발표하고 밀어붙였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정주영이 아니었다.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라며 반발했다. 이에 당황한 경총 사무국 책임자는 당국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정 회장의 발언을 절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두환 '국보위'에 당당하게 맞서
업무 지시 전 꼼꼼하게 사전 준비
 

그뿐이 아니었다. 정주영이 국보위가 마련한 구조조정안에 반대하자 국보위측은 “국책에 대항하느냐”며 다그치자 이에 지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당당한 대응논리를 폈다. “나는 어떤 사업이든 땅을 준비하는 데서부터, 말뚝 박고 길 닦아서 그 위에 내 공장을 내가 지어서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또 그렇게 만든 사업체를 어려워서 넘겼거나 이득이 많이 난다고 프리미엄을 받고 누구한테 넘겨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만든 것들은 하나하나 전부가 다 자식이나 마찬가지의 애착과 정성으로 키워서 성공시켰고, 실패한 것이 하나도 없다. 누구처럼 수단을 부려 경쟁 입찰 아닌 수의 계약으로 남의 기업을 차지한 적도 없다. 그런 식의 기업 경영을 나는 증오한다.” 

참으로 겁이 없는 인물이다. 여기서 “누구처럼”이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듯이 김우중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그런 뚝심에 신군부는 전경련 회장 자리를 물러나게 하려고 압력을 가했지만 이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서슬퍼런 신군부에도 당당했던 정주영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렇게 그 누구에게도 절대 굴복하지 않고 당당한 정주영이었지만 경영 세부에 있어선 여러 가지 일화가 있음은 물론 인간적인 면이 곳곳에서 부각되었던 사람이다. 이번 회에서는 그의 인간 됨됨이는 물론 경영 측면에서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흔히 정주영 하면 “불도저” 쯤으로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주영과 가까이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명처럼 공격적이거나 무조건 밀어붙이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뜻밖에 섬세하고 정직한 면이 존재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또 업무를 지시하기 전에 남들보다 더 치밀하게 생각하고 계산한 뒤에야 지시하며, 지시한 다음에는 불같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1982년 국내에서는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대기업들은 한결같이 프로야구에 참여했지만 현대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정주영은 이렇게 말했다. 

“비즈니스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야 돼. 그래서 일본처럼 트릭을 써서 비즈니스를 할 생각이 없어. 우린 국내의 삼성이나 대우하고도 다르잖아? 그래서 80년대 초 전두환 대통령 시절 프로야구를 창단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나는 거절했어. 야구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정직하지 못한 도루(steal)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 까닭에 우리는 미움을 받았지만 후회하지 않아. 사업이든 스포츠든 정직하게 해야지 속임수를 쓴다는 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정치자금을 제공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이권 청탁을 하거나 청탁을 받은 적이 없어.” 

물론 12년이 지난 1994년 당시 인천 연고지의 태평양 프로야구단을 인수하여 야구에 뛰어 들었지만 정주영은 속임수를 절대 싫어한 사람이었다. 

"미수교국서 어떻게 돈 벌겠나"
중국 부총리 투자 권유 단칼에 거절
 

정주영을 잘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엉뚱하게 내뱉는 말을 듣곤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사전에 충분히 계산된 것이라고 한다. 1991년 7월 우리와는 미수교국인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다. 당시 중국 8대 원로의 한 사람이자 현직 경제부총리가 정 회장 일행을 인민대회당에서 공식 접견하는 자리였다. 인민대회당에서 접견한다는 것은 한국이 미수교국이지만 정 회장 일행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준다는 의미였다. 

부총리는 기획원 부부장을 시켜 중국의 경제개발 계획과 해외투자에 대해 상세한 브리핑을 하게 했다. 현대의 중국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속내였다. 브리핑이 끝난 뒤 부총리는 슬며시 현대가 중국에 투자를 하면 적극 협조해주겠다는 언질을 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이에 대해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정 회장을 제외한 한국 일행 모두는 긴장했다. 저렇게 단칼에 거절해도 될까하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동안 저희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해주셨습니다. 더구나 인민대회당에서까지 환대를 해주시니 고맙고 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부부장께서 브리핑 하신 것을 들으니 중국의 전망이 그렇게 밝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저희는 중국에 투자할 형편이 못됩니다. 죄송합니다만 그 까닭은 중국이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기업인 저희가 중국에 투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어떻게 돈벌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 앉아 계신 노재현 대사님은 우리나라의 원로급 대사인데 중국과 수교가 되지 못하여 여기서 대사 대접도 못 받고, 대사관 간판도 못 걸고 있는 형편이지 않습니까? 이해하시겠지요?” 

중국의 부총리에게 투자 거절에 대한 사유를 분명히 해주지 않으면 외교적 문제가 생길 염려도 있기에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이번 중국 방문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엄청난 나라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에 정말 투자를 해야 하겠다는 욕심이 커집니다. 앞으로 사람을 보내 중국에 대해 더 조사를 하고 많은 연구를 하겠지만 우리가 중국에 투자할 수 있으려면 중국이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수교를 해야만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중국의 부총리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낼 수 있을까? 그는 당당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또 설득력 있게 현대의 중국 투자시기에 대해 못을 박았다. 정주영의 당당한 민간외교 덕이었을까? 한중수교는 정주영 일행이 중국을 방문한 1년 뒤인 1992년 8월 공식 체결됐다. 당연히 이로부터 현대의 중국 투자도 시작됐다. 이후 중국에서 정주영 회장은 듣기 싫은 소리도 과감하게 할 줄 알지만 정중하고 솔직한 그리고 정직한 경제인으로 알려졌다고 현대종합상사 상무를 지낸 박종용 씨는 증언한다. 

일에 파묻혀 살 것 같던 정 회장
김남조 시인에 감성담긴 편지도
 

가까이에서 수행했던 현대종합상사 전무를 지낸 황성혁 씨는 이런 일화도 들려준다. 그는 초대형원유운반선(VLCC)을 계약하러 홍콩에 가는 정 회장을 수행해야 했고 정 회장보다 하루 먼저 가서 준비를 했다. 다음날 호텔방에 도착한 정 회장의 가방을 챙기고 옷들 위에 놓여 있던 책 한권을 무심코 정 회장의 침대 머리맡에 꺼내 놓았다. 김남조 시인의 수필집이었다. 그리고 정주영은 VLCC 계약을 마쳤지만 몹시 분주하고 시달리는 유쾌하지 못한 날을 보냈다. 

직접 계약서에 서명하러 간 정 회장이 황 전무에게 계약을 하도록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음날 아침 5시 30분 황 전무는 정 회장 방으로 들어갔다. 정 회장은 무언가 쓰고 있으면서 비행기 탈 준비를 해야 하니 잠시 기다리라 했다. 이때 정 회장의 등 너머로 정 회장이 쓰고 있는 것을 훔쳐보았다. 뜻밖에도 편지였다. 그것도 업무적인 것이 아닌 사적인 편지로 “존경하는 김남조 교수님께”로 시작됐다. 

황 전무가 머리맡에 두었던 수필집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구의 정 회장, 업무 밖에 모를 것 같았던 정 회장, 철저한 계산으로 살아갈 것 같았던 정 회장 그는 그렇게 감성적인 구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