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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덕유산 호랑이 "문태수"를 아십니까?

호남의병대장의 자정순국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倡義)하는 마음으로 뭉쳐 있으니, 4천년 역사와 5백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는 구한말에 덕유산을 무대로 삼았던 의병장 문태수 [1880-1913]  선생이 1908년 2월에 발표한 격문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전력이 투입되어 구국의 성전(聖戰)으로 승화된 의병전쟁이 한창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결사항전을 각오한 선생의 굳은 신념이 생생하게 배여 있다.

   
▲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문태수 선생은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신기(장구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평이고, 본명은 태진(泰珍)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가 태수(泰洙) 혹은 태서(泰瑞)였다고 한다.

어려서 선생은 마을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17세 되던 무렵 태어난 동네에서 육십령 너머의 장수군 계북면으로 이사하였다.

한편, 선생이 장성해 가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특히 1894년 동학농민 전쟁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대한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일본군대가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갑오변란을 일으키고, 갑오경장을 강요하면서 내정을 간섭하는 침략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한층 격화되던 무렵, 선생은 지사 · 동지들을 모아 구국을 위한 거사를 준비하였고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을 찾아가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하였다.

1906년 봄 덕유산 일대에서 산포수 등 동지를 모아 무주군 안성면 소재 원통사(圓通寺)를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용장 박춘실(朴春實, 본명 朴東植)의 부대와 함께 장수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경남의 함양·거창, 전북의 장수·무주·진안·임실, 충남의 금산 등지를 오가며 덕유산과 적상산, 성수산 등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60여 회에 걸쳐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말 13도창의군이 결성되자 ‘호남의병대장’으로 연합의진에 가담하여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하였고, 1908년 무주 헌병주재소, 장수 헌병주재소 및 관공서 등을 습격하였으며, 1909년에는 충북 옥천의 이원역(伊院驛) 폭파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집중되는 가운데 무주, 장수, 거창, 함양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전을 벌였으나, 1911년 8월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1913년 2월, 34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0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자료 :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