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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의열단원으로 하시모토를 응징한 "박재혁 선생"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재혁 (1895~1921) 선생은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아버지 박광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사립육영학교(현재 부산진초등학교)에 들어가 근대적 교육을 받았고,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최천택(崔天澤)·오택(吳澤)과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1913년 선생과 최천택 등은 구세단을 조직, 활동하다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어 1917년 6월 거금 700원을 조달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중국, 싱가포르 등지에서 무역상으로 일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고, 1920년 4월경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참여하게 된다.

   
▲ 박재혁 선생

의열단은 1920년대 전반기 암살과 파괴 방식으로 강도 높은 의열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로 주요 일제기관들에 대한 동시 투탄거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관련자 20명이 체포되어 거사가 좌절되자 이에 대하여 복수를 결의하게 되었다.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동래 부산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총독부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일제경찰에 의해 탐문되기 시작하자 하루빨리 거사를 단행하기 위해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1920년 9월 14일, 중국인 고서상(古書商)으로 가장한 뒤 중국 고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시모토 경찰서장을 찾아가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지자 경찰서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선생도 폭탄이 터지면서 오른쪽 무릎 뼈에 중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서장은 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 절명하였다.

   
 

이후 선생은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무렵 동지인 최천택이 자주 면회를 갔는데 당시 선생은 면회를 온 최천택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하였고 1921년 5월 5일 최천택이 다시 면회를 갔을 때,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 중”이라고 하였다. 그후 선생은 5월 11일, 결국 단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해방 후 선생의 시신은 정공단(鄭公壇)에 합사되었다가 1969년 4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2008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국가보훈처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