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최미현 기자] 서울 구파발에서 가까운 진관사는 도심 속에서 느껴보는 심심산골의 절집 같은 느낌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북한지 北漢誌》에 따르면, 신라 진덕왕 때 원효대사가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창건하여 처음에 신혈사(神穴寺)라 하였다. 그 뒤 고려현종이 중창하고 진관사라 바꿔 불렀다.
진관사는 고려때부터 왕이 직접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정도로 왕실의 보호가 컸으며 1099년(숙종 4)과 1110년(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태조는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위하여 법식(法食)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지냈다.
▲ 진관사 소장 3.1 운동 때 태극기
이를 본받아 척불왕이던 태종도 1413년(태종 13) 이 절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이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나한전·독성전(獨聖殿)·칠성각·홍제루(弘濟樓)·종각(鐘閣)·일주문·선원(禪院)·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 신대한(新大韓) 제 1호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대웅전에 봉안된 본존불은 고려현종을 구해준 불상이라 전하며, 홍제루의 고색이 깃든 초석이나 축대, 대웅전 후면의 축대나 석불 등은 이 절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법당 앞에는 석탑 대신 석등 2기가 있다.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津寬寺) 칠성각(七星閣)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 6종 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문류의 발행일자가 1919년 6월~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며 확보한 자료로 추정된다.
▲ 경고문(警告文)
이렇게 귀중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가 같은 장소에서 일괄적으로 발견되었다는데 그 의미가 클 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 이후 6월에서 12월까지 중국과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 연구를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2010.02.25 문화재지정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 354 진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