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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북만주 지역의 대표 독립운동가 '손정도 선생'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손정도(孫貞道, 1882. 7. 26 ~ 1931. 2. 19) 선생은 1882년 7월 26일 평안북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태어났고, 아호는 해석(海石)이며, 자는 호건(浩乾)이다. 6살이 되는 1888년부터 당시의 관습대로 향리에 있는 사숙(私塾)에서 17살이 될 때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면서 성장했다. 1895년 13살이 되자 선생은 같은 동리 박용(朴鏞)씨의 장녀로서 2살 위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1902년(23세) 선생은 관리가 될 생각으로 평양으로 떠났는데, 가는 도중 날이 저물자 하루 저녁을 우연히 조 목사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조 목사로부터 새로운 학문과 세상 돌아가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독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 손정도 선생

 
 
 

 1907년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다니다가 휴학하고, 평양 남산현(南山峴)교회의 부목사를 맡았다. 그러면서 이승훈이 세운 영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후 북만주 지역의 선교를 명 받은 선생은 먼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기 위해서 중국어를 배우고자 북경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민족운동가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일본 수상을 지낸 가쓰라 타로(桂太郞) 공작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선교지는 중국 천진(天津)이었다. 그는 여기서 중국인들을 상대로 포교하다가 다시 하얼빈으로 가 본격적인 북만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여기에 본거지를 두고 이주해 온 동포들과 중국인들을 상대로 목회하였고, 안동(安東),하얼빈,간도지방, 그리고 1912년에는 잠시 동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는 독립운동 근거지를 세우고 독립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독립운동계 인사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한 일본 관헌들은 예비검속(豫備檢束)이라 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검거하였고, 선생도 잡혀 일본영사관에서 고문을 받았다.

이후 상해임시 정부를 거쳐  북만 지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921년부터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이곳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시키고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또 그러한 점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길림한인교회 안에 유치원과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2세들의 교육, 특히 민족교육에 전력을 기울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제6회 (1919)아래왼쪽에서5번째가 손정도 선생 
     
 
 선생이 북만지역으로 자신의 활동 근거지를 옮겨온 가장 중요한 목적은 독립운동 근거지를 세우자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의 재산을 팔아 액목현 지역에서의 토지구입과 농민호조사의 설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생산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근대 과학적 영농 방법과 기계, 수력전기 개발에 힘썼고 교육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위생생활을 유도하여 보건에 대해 계몽 했다. 이처럼 그의 억척스런 노력에 의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는 길림 일대 동포들이 모여 살 만한 터전을 마련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혁신파 독립운동자들과의 연계 하에 길림에서 활동무대를 마련한 해석은 교회 일을 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며 활동하였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고, 이를 독립지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토록 하는데 힘썼다.

동시에 그들과 독립운동문제를 협의하고 함께 실천했다. 그는 정의부가 계획한 농업공사의 설립에 협력하였고, 이때까지의 독립투쟁 방법을 반성하고 새로운 정당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성립된 단체인 고려혁명당에도 협력하였다. 통일된 정치이념을 통해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 역량을 하나로 묶는 유일당운동의 결과인 고려혁명당에 대해 많은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했다. 비록 내분으로 실패는 했지만, 민족협동전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해석은 이후 삼부통합운동 등 민족유일당 운동에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하는 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위장병으로 고생을 하던 선생은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쓸쓸히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살다 1931년 2월 19일 밤 12시 운명하였다.

 정부는 1996년 9월 11일 국내로 그 유해를 봉환하였고, 12일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했다. 정부는 이에 앞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 :